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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May 31. 2023

산본과 그녀 (2편)

가혹했던 청춘의 뜨거움


 2000년 여름은 무척 가혹했다. 예비군 훈련을 마치는 시간에 환호성을 울리며 합격 통지를 받았던 모 케이블 방송사의 수습기자 생활은 기대와 전혀 달리 나를 궁지에 몰았다. 일은 일대로 생활은 생활대로 어느 하나 탈출구가 없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내용도 잘 모르는 주식/금융 관련 기사를 취재와 보충 학습을 통해 꾸역꾸역 마감시한 내에 제출해야 했고, 점심 회식부터 회사 임원이나 선배들과 못 마시는 술을 마셨으며, 업무가 끝나면 저녁 시간에는 단 하루도 빠집 없이 직장 사람들 혹은 외부 손님들과 술자리를 가져야만 했다.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이 오면 어김없이 혼돈의 전쟁터로 가야만 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돌아볼 겨를도 에너지도 의지도 없었다. 날이 갈수록 회사 나가는 것이 싫어져만 갔다.  


 당시 사귀던 여자 친구에게도 이런 고민과 어려움을 호소했을 것이다. 그녀를 더 자주 만나고 싶었고, 위로도 받고 싶었으나 물리적인 시간의 제약이 컸다. 게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통화마저 점점 뜸해지는 상황이 되었다.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채 첫 직장생활을 힘겹게 이어오던 8월 어느 무더운 나날, 나는 짧은 휴가를 다녀오면서 퇴사를 결심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그녀와의 연락도 끊어졌다. 


 사귀는 동안 그녀를 집에다 바래다준 적은 많았으나, 정작 정확히 어디에 그녀의 집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데이트가 끝나고 그녀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에 내리면 그녀는 작은 육교를 건너 총총 귀가하곤 했다. 집 앞까지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단 한 번도 허락을 받지 못했다. 한사코 혼자 가겠다고, 나는 바로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라고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어린아이처럼


 23년이 지났으나 그때를 떠 올리자 새로 나온 스마트폰처럼 화소가 꽤 많은 선명한 기억의 스크린이 열렸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산본 중심상가의 한 조그만 카페에서 TS와 그녀를 기다리며 잊고 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 약속은 오후 6시였는데 나는 오전 10시도 안 되어 산본에 도착해 있었다. 테니스 대회가 비로 인해 취소된 탓도 있었지만, 8시간 전부터 약속장소에 가 있는 나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나. 오후가 되어 TS에게 문자를 하나 보냈다. 산본에 이미 와 있으니, 혹시 시간 되면 좀 더 일찍 만나도 좋다고. 집안일이 있어 좀 힘들다고 했던 TS는 결국 5시까지 산본중심상가 분수대 앞으로 오라는 회신을 주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55분이 되었다. 우산을 챙겨 들고 분수대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성당 청년회 활동을 하던 시절 저녁 7시 미사가 끝나고, 간단히 회합을 한 후에 우리들은 이 중심상가로 이동해 뒤풀이를 하곤 했다. 분수대는 산본중심상가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어서 주변 풍경이 사방팔방으로 열려 있다. 머리로는 옛 추억을 떠 올리고, 눈으로는 이제 곧 만나게 될 두 사람의 모습이 어디에서부터 비칠는지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산본으로 오는 길부터 마음이 들떠 있었으나, 5시가 다 되어가자 몸마저 살짝 부유하기 시작했다. 


 비현실적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내가 서 있는 곳 맞은편에서 갑자기 나타난 두 여자의 실루엣.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현실감이 결여된 23년 내 마음속의 이미지. 어쩌면 살면서 다시는 볼 수 없을지 모른다 여겼던 사람이 이렇게 불쑥 현실 세계로 들어와 버렸다. 페북에서 그 이름을 찾아본 적도 많았으나, 전국 단위로 보니 같은 성에 같은 이름이 너무 많았다. 나중에 본인의 입으로 확인한 결과, 페북이나 인스타와 같은 SNS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하니 어찌 흔적이나 찾을 수 있었을까. 아, 딱 한 번 그녀의 흔적을 만난 때가 있었다. 오래전 사라진 싸이월드에서 그녀는 자신의 눈을 꼭 닮은 딸의 사진을 몇 장 올려놓았었다. 


 " 잘 있었어? TS, GX? " 담담하게 말하기 위해 애썼다.

 "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오빠 " 그녀가 깍듯한 경어를 쓰며 응수했다. 그래도 미소가 밝았다.

 " 오빠! 잘 지냈어요? 진짜 오랜만이다. " TS는 정말 반가운 듯 인사해 주었고, 예전처럼 내게 편하게 말했다. 


말하는 나, 생각하는 나


 대화를 나누며 TS를 보는 건 자연스러웠으나, GX를 보는 일은 조금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TS에게 말을 건네면서 살짝살짝 GX를 쳐다보는 식으로 대화가 진행되었다. 우리는 비나리는 이 날, 한적한 호프집 하나를 찾아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테이블 맞은편 왼편에 그녀가, 오른편에 TS가 자리를 잡았다.


 " 그니까 오빠.. 나도 정말 몰랐어. 얘가 진짜 오빠랑 헤어진 이유 말야! " TS가 장난기 섞인 웃음을 띠며, 힐끗 옆자리 그녀를 보며 말했다. 나도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어떤 표정으로 듣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TS는 어릴 적에도 말할 때 상대에게 가끔 은근 짓궂은 구석이 있었는데, 이때도 당사자인 그녀와 나를 놀리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물론 아무 사심이 없고, 친근함이 배어 있는 말투였다. 


 열흘 전 TS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을 때, 유선상으로 묻지 않고 참았던 것은 그녀를 만나 직접 그 이유에 대해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때가 된 것이다. 


 " 오빠가 부모님과 한 번 만나자고 말했어요. 오빠가 직장에도 들어갔고,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 오래전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그녀는 내게 미안해하며 말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어 편부 가정이었다는 점, 양가 집안도 차이가 난다고 느꼈던 점 등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했다.  


  그녀는 많은 말은 아끼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으로 직접 23년 전 그녀가 나를 떠나야만 했던 이유에 대해 들으며, 그저 혼자 상상하고 또 추측하기만 했던 의문이 힘없이 풀리고 있었다. 그녀도 어렸고, 나도 어렸다. 아주 쉬운 상황은 아니었을지언정, 극복하지 못할 치명적인 문제는 아니었다는 걸 우리 세 사람은 세상을 좀 더 살고서야 알게 되었으리라.


 우리는 오랜 세월에 켜켜이 묵힌 이야기들을 끄집어내기도 했고,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 이를테면 아이들이 몇인지 얼마나 컸는지, 사는 데는 어딘지, 지금은 무얼 하고 있는지 묻고 대답했다. 평소 술을 거의 마시지 않지만, 이날만큼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들이 각각 맥주 한 잔과 하이볼 세 잔을 마실 때 나는 맥주 몇 모금에 하이볼로 목을 살짝 축이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분위기가 그러했다. 


 둘이 아니라 셋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에 자리가 어색하지 않았다. 마치 몇 달 전 만난 사람과 이야기 나누는 정도의 느낌으로 편안히 서로를 대했다. 그러나 말을 하는 나와 머리와 가슴으로 생각하는 나가 분리되어 있었다. 적당한 수사를 써서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가는 내가 있었던 반면, 반대편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의 표정과 몸짓을 주의 깊게 살피며 그 마음속을 헤아려 보려 애쓰고 있던 나도 있었다. 


 시간은 한여름 땡볕 아래 놓인 아이스크림처럼 금세 녹아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제 그들을 보내 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 비가 내리고 있다는 핑계를 대며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했다. 둘 다 집이 산본이었기 때문에 처음엔 사양했다. 재차 권하기를 몇 차례. 집이 더 가까운 TS를 먼저 내려주기로 하고 두 사람을 차에 태웠다. 다음을 기약하며 TS가 먼저 내렸고, 차는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어린 시절엔 단 한 번도 그녀의 집 앞까지 가보지 못했는데, 23년이 지나서 해후한 이날엔 그녀를 태우고 집 앞에 내려 주게 되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안녕히 가세요. 태워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 마지막까지 그녀는 깍듯이 경어를 쓰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내리고 차는 크게 유턴을 하며 방향을 틀었다. 조수석 창문을 열며 짧은 인사를 던진 후 어두운 거리로 빠져나왔다. 참고 있었다는 듯, 제법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비현실적인 그날의 화면이 막을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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