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저녁 여섯 시가 조금 넘어 연습실의 문 앞에 선다. 이 문 너머에 누가 있을까 잠시 상상을 해 본다. 누가 있을지 대략 짐작은 하고 있다. 늘 먼저 와서 기다리는 우리의 지휘자 보훈이가 가운데 탁자 뒤로 밝게 웃고 있다. 오른편으로 바리톤 동규가 은빛으로 반짝이는 뒤통수를 보이며 말하고 있다. 조금 늦게 합류했지만, 엄청난 성실함으로 핵심 멤버가 된 테너 훈영이가 왼편 의자에 앉아 있는 게 보인다.
한 주는 나이가 들수록 늘 나의 마음보다 앞서 휘리릭 흘러 어디론가 가 버린다. 노래를 오랜 시간 불렀지만, 노래를 부르는 시간은 언제라도 기다려지고 설렌다. 쉰을 넘긴 친구들은 아직 일상이 바쁘다. 무언가 해야 할 일들에 쫓기며 지내다 수요일 저녁 합창연습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지만 축축함이 느껴지는 지하 연습실에서 발견하는 그 눈빛들이 말해 준다. 지쳐 있던 그 눈에 생기가 돌고, 누가 뭘 뿌렸는지 낮까지 어른이었다 연습실 문턱을 넘자 아이로 돌아오는 신기한 화학적 반응이 느껴진다.
오랜 시간을 흘려보낸 후에 노래로 만난 친구들 가운데엔 졸업 후에 처음 통성명을 한 친구도 있고, 만난 지 삼십 년이 넘은 친구들도 있다. 모두 대학 동기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동창 사이인 친구들도 제법 있다. 만남의 시간과 서로가 함께 나눈 추억의 양이 다르다. 그래도 한데 자연스레 섞여서 아이들처럼 입을 맞춰 노래를 부르고, 쉬는 시간에는 간식을 먹으며 왁자지껄 수다를 떤다.
합창단에 들어오려면 어느 정도 노래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실제로 성가대나 합창단 같은 곳에서 노래를 많이 불러 본 친구들이 있다. 아니면 소싯적 한 노래 불렀을 것 같은 실력자들도 눈에 띈다. 아마 이 친구들은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합창단에 적응하고 보다 쉽게 새 노래를 배울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일 년 가까이 여러 다양한 친구들과 노래를 부르며 느낀 것은 이런 개인적인 수준 차이가 대세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거였다. 처음 시작은 달라 보였는데 수십 명의 합창단원 친구들이 함께 꾸준히 화음을 맞추고 연습을 하다 보면 신기하게 점점 상향평준화가 되면서 퍽 근사한 하모니를 만들어내곤 하는 걸 경험했다.
매일의 삶이 신나고 설레는 일상으로 채워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건 쉽지 않잖아. 알고 있다. 그냥 일주일에 한두 번이라도 이런 기쁜 시간이 마련되어 있다면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라는 걸 이제는 좀 알 때가 됐다. 나이가 들면서 힘든 것 중 하나는 마음과 머릿속에서 고민 리스트가 떠나지 않는다는 거다. 내 마음이, 내 머리가 편하게 숨을 쉬려면 무언가 잊고 집중하게 할 꺼리가 필요하다. 내게는 흠뻑 땀 흘리며 뛰게 하는 테니스가 그렇다. 대학 친구들 덕에 요새는 골프, 탁구, 농구 등 그 순간 다 잊게 하는 운동 꺼리가 늘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구삼고음과 함께 하는 노래시간이다.
미리 걱정할 건 아니지만, 이 시간들이 얼마나 내 인생에서 귀하고 행복한 시간일지 가늠이 될 나이가 되어선지, 좋으면서도 아깝다. 내가 지금 그 안에 있는 걸 알고 있고, 잘하면 오래오래 이 시간을 지속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들면서도 그립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금 몇몇 친구들의 얼굴이 떠 오른다. 때가 되면 또 함께 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망설이고 있는 친구들, 한 번도 노래를 같이 하는 걸 생각해 본 적 없는 친구들! 어서 오시게나! 어떤 친구들이 올지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