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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Nov 30. 2022

정신 차려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이모는 엄마랑 헤어질 때, "얘! 정신 차리고 다녀"라고 말한다고 했다. 나와 동생도 유행어처럼 그 말을 주고받는다. 기억력을 신뢰할 수 없게 된 지는 이미 오래고 차선책으로 메모를 선택했지만 가끔은 메모했다는 사실조차 잊는다. 최근 한 책에서 "우리의 기억은 분명하고 생생하며, 매우 잦게는 통째로 잘못되었다."라는 구절을 읽고 탄식했다. 나도 이모랑 비슷한 말을 동생에게 하는데, 그 말이 조금 변했다. 예전엔 이모랑 똑같이 말했는데 이젠 "너라도 정신 차리고 살아."라고 한다. 둘 중 하나는 정신 차려야 될 거 아냐.     


낡고 초라한 머릿속 기억 저장소만 믿고 살기엔 불안한데, 가끔 내 기억을 백업하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면 안도가 된다. 얼마 전 버섯머리와 버섯머리의 동생이 가게에 왔는데, 우리는 인생의 거의 모든 순간을 함께 살고 있다. 내 기억의 방에 남아있는 최초의 조각에도 버섯머리는 함께인 것 같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추억이 버섯머리네 기억의 방에는 남아있다. 내게 없는 기억이 동생의 기억방에 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유치원에서 아침 조회 후에는 옆방으로 가서 수업 시간에 앉을 의자를 각자 맡곤 했는데 인기가 많았던 동그라미 의자를 버섯머리가 꼭 내 것까지 맡아주었다. 얼마 전에 그것이 내 기억의 방에만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각자 기억의 불완전성을 보완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자주 꺼내 보는 기억일수록 변색되어서 진짜로부터 멀어진다는 연구가 있다. 가장 잘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가장 왜곡한 채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다. 소중한 기억일수록 최대한 꺼내 보지 않아야 한다는 말인데, 마치 덕후가 아이템을 소장용, 관상용 2개씩 사듯 기억을 두 개로 복제할 수 있으면 좋겠다. 어쩌면 그 '소장용'이 타인의 기억방에 있는 게 아닐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방식이 나쁜 기억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뇌의 부정성 편향 때문에 각자 기억의 방에는 오히려 나쁜 기억이 더 많을 수도 있다. 오싹하군.  

   

사진의 고마움도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추억 때문이 아니라 기억 속에 전혀 남은 것이 없어도 사진이 증거가 되어주기도 하니까 얼마나 고마운지. 그렇게 고마운데 친구들끼리 모여도 사진을 찍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지금은 어릴 때 찍어둔 사진으로 기억을 보완하는데 더 나이가 들면 그조차 어렵게 되었다. 백업은 인생의 진리다. 잊지 말자.     


백업. 그래 백업. 직생활을 하는 동안 문서작업을 참 많이 했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 때 생긴 오랜 습관은 Ctrl+S 키를 거의 한 문장마다 누르는 것이다. 거의 완성한 문서를 통으로 날리거나 애써 정리한 자료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어릴 때부터 습관처럼 Ctrl+S를 눌러댔다. (주변에서 “으악!” 스러운 재앙을 볼 때마다 내 손은 열심히 Ctrl+S를 눌렀다.) 무의식적으로 마침표를 누르면 Ctrl+S를 같이 눌렀다. 멀뚱히 화면을 보다가도 단축키를 누른다. 덕분에 큰 사고를 당한 적은 없는데, 인생에도 그런 단축키가 있으면 좋겠다. 수시로 누르면서 저장할 수 있는 단축키. 어떤 장치를 마련해야 할까? 기억 소환의 트리거가 될만한 혹은 저장의 트리거가 될만한 작은 습관을 하나 만들면 될까?      


어쩌면 지금도 쓰고 있는 이런 기록들이 기억의 백업일지도 모르겠다. 정신 못 차리고 사는 나를 위한. 분명 생생하며 매우 잦게는 통째로 잘못된 나의 기억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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