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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Dec 15. 2022

멸치는 어디에나 있다.

우리 집에는 몇 가지 미스터리가 있다. 그중 하나가 멸치 미스터리. 멸치볶음은 나의 최애 반찬 중 하나인데, 우리 집에선 즐겨 먹는 사람이 나뿐인데도 엄마가 거의 끊이지 않게 냉장고에 멸치볶음을 채워준다. (사실 버섯볶음도 좋아하지만 엄마는 버섯볶음을 절대 해주지 않는다. 엄마가 싫어하니까.) 어쨌든 큰 멸치 작은 멸치 매운 멸치 담백한 멸치 등등 일 년 내내 냉장고에 멸치가 있다.      


그런데 멸치는 냉장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방문 앞에서, 신발장에서, 심지어 가끔은 욕실 수건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엄마는 멸치를 어떻게 볶는 거지, 혹시 멸치가 살아있나 싶을 만큼 멸치는 어느 곳에나 있다. 이제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침대 발치에서 멸치를 발견한 데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엄마에게 물어도 '아 몰랑' 으로 대답할 뿐. 미스터리는 풀리지 않는다.      


나의 멸치 사랑은 순천에도 퍼져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순천에 다녀왔다. 내려가는 날이 정해지고부터 C는 나에게 뭘 먹일지, 어느 맛집에 가야 할지 고르는데 몰두해 있었다. 하루 걸러 한 번씩 전화해서 뭘 먹고 싶은 지 물어보기도 했다. 엄선한 메뉴로 외식을 할 때는 거의 해산물을 먹었고 집에서는 매 끼니 갓 지은 밥과 반찬을 엄마보다 열심히 차려주었다. 그리고 그 밥상에 빠지지 않고 멸치볶음이 있었다. 자주 순천에 들락거릴 때는      


"우리 시어머니가 멸치를 잘 볶아." 라면서 시어머니가 볶아주신 멸치를 밥상에 올려주기도 했다. 그러면 친구의 시어머니께서 "둥둥이가 멸치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하던데. 이 멸치도 장에서 좋은 걸로 샀다. 많이 먹어."라고 덧붙이셨다. 며느리 친구를 위해 멸치를 볶아주시는 정성에 몸 둘 바를 몰라하며 맛있게 먹었는데, 이번에도 친구는 멸치볶음을 내주었다.      


일 년 내내 먹어도 질리지 않는 멸치볶음을 왜 우리 가족 중에 나만 좋아할까. 갑자기 궁금해서 어젯밤에 엄마에게 물었더니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엄마가 나를 임신했을 때 입덧이 심했는데 멸치볶음만 그렇게 잘 먹었다고 했다. 동생을 가졌을 때는 사과를 좋아했는데, 동생은 내가 멸치볶음을 좋아하는 것처럼 사과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멸치와 사과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태몽으로 옮겨갔다.      


-엄마도 위인들처럼 태몽을 요란하게 꿨어야지. 시시하게 꾸니까 우리가 이렇게 평범하지.      


구름과 오이 꿈을 달고 태어난 자매는 호랑이와 승천하는 용 꿈을 꿔주지 않은 엄마를 타박했다. 구름 꿈과 멸치볶음으로 자라난 나는 그냥 통뼈를 가진 범인으로 살고 있다. 다만 그때 맺어진 나와 멸치의 인연이 지금도 우리 집 곳곳에 살아있는 건 아닐까. 어디에서든 눈에 띄는 멸치의 상서로운 기운. 같은 건 아니고 그냥 덜렁거리는 엄마와 같이 살고 있을 뿐이다. 한동안 동생은 나와 엄마를 동시에 용의 선상에 올렸지만 지금은 자연스럽게 엄마로 좁혀졌다. 다행이다.      


그날 멸치에서 시작된 대화는 태몽을 평범하게 꿨으면 이름이라도 남다르게 지었어야 하지 않느냐는 동생의 한탄으로 마무리되었다. 명성을 떨치는 사람들은 다 이름이 범상치 않은데, 우리 이름은 애초에 위인이 되기엔 글렀다는 것이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슈마허, 우사인 볼트, 메시, 이름만 들어도 느낌 오잖아. 나는 그냥 멸치 좋아하는 통뼈 자영업자 느낌의 이름을 가진 것일까. 오늘 점심에도 멸치볶음을 먹었지만 내일 아침에도 멸치볶음을 먹어야겠다. 그리고 내일 아침엔 세수를 하다가 비누에 붙은 멸치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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