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WonderPaul
May 15. 2023
C가 인천으로 이사 온 지 두 달이 넘었는데 제대로 만나질 못하고 있었다. 3월 초, 마감 시간 즈음 가게에 왔다가 집에 데려다주고 간 게 전부다. C의 하루는 촘촘하게 바쁘다. 아이들도 챙겨야 하고 아버지 회사에 가서 일도 도와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한다. 마라탕도 먹으러 가고 소문난 떡볶이 맛집도 가자고 했지만 아직은 못 가고 있다. 그 사이 둘째 아이가 입원도 했었다. 첫째는 전학 간 지 얼마 안 됐는데 봄 소풍은 즐겁게 잘 다녀왔는지 모르겠다.
종일 시간표에 맞춰 움직이느라 바쁜데, 만약 누군가 C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면 친구는 자신의 일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다. 흔히 말하는 직업으로는 그녀의 일을 규정할 수 없다.
P는 최근 10년의 공백을 깨고 출산 전 다니던 회사에 복직했다. 계약직이긴 하지만 집에 있을 때보다 안색이 좋아졌고 사무실보다 현장으로 출근하는 것도 오히려 좋다고 했다. 10년 만의 복직이라니 대단하지.
육아 때문에 경력이 단절된 지인들 중 다시 일하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다. 이유는 제각각이다. 그 와중에 아직도 육아를 현실도피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아이를 낳지도 키우지도 않는 내가 오래 말할 건 아니란 생각에 대화를 길게 잇지 않았지만, 그때와 달리 결혼도 하고 아이도 키우고 있는 그녀는 지금도 육아를 현실도피라고 생각할까?
노동의 미래에 대한 글들을 읽으면 전망이 썩 좋지 않다. 최근 우리 동네 이마트 앞에는 대규모 인력감축에 대한 이마트 직원들의 투쟁 현수막이 걸렸다. 그중에는 이런 현수막도 있었다. "일반 계산대를 이용해 주세요! 그래야 계산원들의 서비스를 계속 받을 수 있습니다." 몇 달간 리뉴얼 공사를 하는 중에 대규모 구조조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자동화 시스템에 밀려 인력감축으로 고통받는 노동자의 모습은 낯설지 않다. 그런데 그에 대한 호소가 방향을 잘못 잡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에서는 연금 개혁을 두고 반발이 심하다. 어쩌면 근 미래에 우리나라에서 벌어질 일일 지 모른다. 2000년대 초반 어느 인터뷰에서 코미디언 전유성 씨에게 노후대책을 물었을 때 그는 "일하는 게 노후대책"이라고 말했다. 자기는 죽기 전까지 일할 계획이라고. 나이에 걸맞은 적당한 노동을 지속할 수 있다면 축복받은 인생일 것이다. 나도 노동이 노후대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나는 과연 몇 살까지 원하는 일을 하며 적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나이가 들었을 때 원하지 않는 일이라도 할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싶다.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세상에 오래 남겨질 것이 두렵다. 100세 인생이 과연 인간에게 축복인가 하는 생각도 따라온다.
직업의 정의에 대해 "그 일을 통해 적더라도 돈을 번다면 프로, 아니라면 아마추어"라고 생각했는데 아닐 수도 있다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어떤 프로 예술가들은 열심히 활동해도 전혀 돈을 벌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벌어들인 돈보다 그 일을 위해 쓰는 돈이 더 많아 결국 마이너스가 되는 경우가 있기도 하고. 열심히 하지만 그 일로 돈을 벌지 못하면 아직 직업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게 맞을까? 그 직업을 가지고 싶어서 노력하는 중이라고 해야 할까.
프랑스에서는 최저 생계 유지비만큼 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정부보조금을 지원해 주는 제도가 있는데, 일을 하면서도 최저생계유지비를 벌지 못하는 경우엔 오히려 실업 상태가 낫다고도 한다. 바로 워킹푸어인데, 워킹푸어는 일정 부분의 돈을 벌기에 직업인이지만 마이너스 직업인이다. 하나의 직업으로는 밥벌이가 어려워서 서너 가지 직업을 가진 사람의 경우,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일을 직업이라고 말할까? 가장 많은 돈을 벌어주는 일을 직업이라고 말할까?
경제성이 아니라 기간으로 직업을 규정해 볼까? 사전에서는 직업을 이렇게 말한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
벌써 의문이 몇 가지 떠오른다. 애매함의 민족답게 일정한 기간이라고 표현했다. 사전에 이렇게 모호한 표현을 써도 되나. 일정 기간은 얼마를 말하는 걸까. 수습기간만큼? 1년? 아니면 한 달은 어때? 적성과 능력과 아무 상관없이 돈을 벌고 있다면 그건 직업이 아니란 말인가? 도움 받으려고 사전을 찾아봤다가 더 곤란해졌다.
기간으로만 본다면 가정주부들은 거의 평생 은퇴도 없이 일하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그걸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잖아. 주부 파업이란 건 없고 주부 은퇴도 없고 주부 실업급여도 없다. 주부를 폄하하는 말들도 아직 많다. 슬프지만 내 주변에서도 그런 말을 심심찮게 듣는다.
옥스퍼드 사전에 JOB을 검색하니
job
noun
work for which you receive regular payment
라고 나온다. 역시 돈을 버느냐가 중요하다고 한다. 직업의 정의를 섞어 절대 소박하지 않은 소망을 말해보자면 내 적성과 능력에 맞는 일을, 먼 미래 걱정 없이 근미래만 소소하게 걱정하면서 적당한 보상을 받으며 가급적 오래 지속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고, 흔한 직업군 안에 넣을 순 없지만 누구보다 부지런히 많은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 그 노동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너무 거창한 바람인 건 나도 안다. 여전히 친구들과의 대화에선 우리에게 닥칠 어느 불안한 미래와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노동이 빠지지 않는 걱정거리이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로 내일은 로또를 사야겠다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말이 마냥 웃기지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