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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Dec 15. 2023

붙일까 뗄까

“느낌표를 너무 자주 쓰면 지나치게 흥분한 14살 어린애처럼 들리죠.”최근에 본 넷플릭스 다큐에서 한 편집자가 이렇게 말했다.  


감탄의 점. 왜 감탄표가 아니라 느낌표일까. 감탄뿐 아니라 다양한 감정들이 그 작은 표시에 들어있기 때문이겠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는 느낌표가 한 번 나온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는 1,683번 나온다.  피츠제럴드는 <재즈 시대의 이야기>에서 느낌표를 544번 이나 사용했다. 후에 피츠제럴드는 "이 느낌표들을 전부 없애. 느낌표는 자기가 한 농담을 스스로 비웃는 것이나 마찬가지야”라고 말했다. 왜 아니겠어.


나도 느낌표를 쓰는 자신이 유치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마치 웃긴 얘기를 하면서 먼저 웃어버리는 재미없는 코미디언 같다. 내가 썼던 글을 다시 보면 나도 피츠제럴드처럼 느낌표 다 빼라고 외치고 싶을 것이다. 그래도 가끔은 느낌표로 과장하고 싶다. 텍스트 대화는 오버가 필요하기도 하니까. 오늘은 임영웅 콘서트 VIP석 티켓팅에 성공했다는 티켓팅 참전용사의 소식을 듣고 느낌표를 날렸다. 우와. 그런 자리를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으로 잡기도 하는구나. 어제는 치킨이 먹고 싶다고 호들갑인 동생한테 느낌표를 날렸다. “어후! 작작해!”


비즈니스 메일에서는 호의를 표현하고 싶거나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싶어서 쓰기도 한다. 느낌표를 언제 가장 많이 쓸까? 놀라울 때, 슬플 때, 화날 때, 당황할 때, 다행스러울 때, 어이없을 때. 감정을 과장할 때, 호의를 표현할 때, 내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신호를 줄 때. 느낌표는 너무 많은 의미 혹은 무의미인 듯하다.


지난주 예배 때 목사님께서 교우 소식을 전하시는 중에 재발 암으로 위중하던 집사님께서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일반병실로 이동하셨고 말씀하셨다. 집사님과는 일면식도 없지만 몇 달째 목사님께서 광고 시간마다 기도 부탁을 하셨기 때문에 나도 매일 그분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소식이 참 반가웠다. 목사님 말씀 뒤로 예배실 곳곳에서 탄식이 터졌다. 그건 안도의 느낌표였다.


동생은 매년 해리포터 시리즈 초판본을 읽는다. 2권이 없는 채로. 범인은 엄마인데 어릴 때 사촌 동생에게 엄마 마음대로 해리포터 2권을 빌려주었다. 1권도 아니고 2권을. 사실을 안 동생은 울고불고 난리가 났고 예상했던 결과가 찾아왔다. 몇 년에 걸쳐 닦달해도 돌아오지 않던 책은 이런저런 국물에 곳곳이 젖고 찢긴 채 죽어서 돌아왔다. 그건 죽은 것이 분명 헸다. 한바탕 뒤집어지는 난리가 있었지만 엄마는 그저 동생의 유난으로 치부했다. 서른이 훌쩍 넘어서까지도 매년 해리포터를 보면서 그 사건을 곱씹고 있는데 말이다.


다시 구할 수도 없는 초판본 2권의 빈자리가 선명하다. 그때마다 동생의 마음에 느낌표가 떠오르고 있다. 며칠 전에는 레고 매장에서 해리포터 에디션을 구경했는데 그중에 하필 2편을 모델로 한 제품이 여럿 있었다. 동생은 죽어버린 해리포터 2권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하필 거기에서 마주치다니. 생일 선물로 그 레고를 사주기로 하고 매장을 나왔다. 임시로 울분의 느낌표에 붙은 가시 몇 개를 떼어냈다. 임시방편일 뿐이지만.


2주 전 인후염이 찾아왔는데 증상이 심해져서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코로나 앓아보셨죠? 그때랑 증상이 어때요? 목이 아픈 것만 같고 다른 증상은 달라요. 인후염으로 "추정"하고 약을 처방해 줄게요. 코로나를 내가 인후염이라고 우긴 걸까.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공식적으로 인후염이고 약이 영 효과가 없지도 않다.


내년엔 주변 사람들에게 그런 식의 치환이 가능하길 바란다. 최근에 무거운 소식들이 많아 마음이 좋지 않다. 모두들 사소한 걱정만 하는 한 해가 되길 기도한다. 오랜만에 방문한 웹사이트 비번을 까먹어서 접속이 안 되는 일이라든가, 버스 배차 간격이 길어서 중요한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은 상황, 새로 산 냄비를 홀랑 태워서 바닥이 새까매지는 일, 흰 운동화에 떡볶이 국물을 떨어뜨리는 일 같이 사사로운 스트레스가 다른 커다란 걱정과 불행을 대신해 주었으면 좋겠다.  


적당하고 고만고만한 걱정과 고민들 끝에 조그마한 짜증과 걱정과 안도, 슬픔의 느낌표만 붙이면 좋겠다. 그리고 한해를 다시 돌아본 후엔 피츠제럴드처럼 “이 느낌표들을 전부 없애.”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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