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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Feb 28. 2024

어쩌다 추로스

새해는 추로스로 시작했다. 흔한 프랜차이즈 추로스지만 갓 튀긴 밀가루는 실패 없는 맛이다. 산책 겸 한 시간 반을 걸어가 따끈한 추로스를 초코소스에 푹 찍어 먹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 내 몸의 감각세포들이 평면으로 활짝 펼쳐지고 그 위설탕과 초코 바른 추로스가 구르는 것 같다. 쫀득한 추로스 스틱을 최대한 천천히 먹으려고 노력한다. 순식간에 한 통을 끝내면 거의 높은 확률로 한 통을 더 먹게 된다. 그렇게 일주일에 두 번은 추로스 집에 간다.      


너무 자주 먹는 것 같아서 머쓱하니까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손님이고 싶었지만 역시 불가능했다. 어느 순간 나를 인지한 사장님께서 초코딥 소스를 듬뿍 담아주거나 하나씩 더 주시기 시작했다. 그걸 노린 동생이 꼭 주문은 나를 시킨다. 가끔은 정말로 추로스가 엄청나게 맛있는 건 지. 한 시간 반이나 걷고 난 후라 맛있게 느껴지는 건지 의문이다.      


오늘도 추로스를 먹고 왔다. 그리고 이렇게 맛있지만 이건 가짜야. 스페인에서 진짜를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하는 대화를 했다. 작년에 '텐트 밖은 유럽' 스페인 편에서 봤던 바삭한 추로스가 눈앞에 둥둥 떠다닌다. 스페인 남부의 추로스는 내가 먹고 있는 추로스보다 훨씬 더 바삭하고 쫀득해 보였다. 동생과 나는 로또에 당첨된다면 스페인에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기회를 주기로 약조했다. 그렇게 되면 진짜 추로스를 먹게 되겠지. 나는 소박하다. 진짜 추로스를 먹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 당첨되게 해 주세요.     


어릴 때 추로스 놀이동산의 음식이었다. 롯데월드에 가면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 엄마가 잘 사주지 않아서 더 먹고 싶어 안달 나는 음식. 정작 어른이 되어서 롯데월드에 갔을 때는 추로스를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금지된 것을 더 간절히 원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 것 같다. 지금은 추로스를 두통이나 사 먹는 어른이 되었다. 더 사 먹을 수 있지만 절제하는 어른.      


일주일에 두 번이나 먹지만 더 자주 밤이 되면 추로스 생각을 한다. 따뜻한 추로스가 혀에 닿는 느낌이나 쪼온득하게 찢기는 식감. 커피와 섞일 때 조화로움을 세세하게 떠올린다. 그러다가 가끔은 이틀 연속으로 추로스집을 찾는다. 내가 사장일 때를 생각해 보면 그런 손님은 기다리게 된다. 이번 주에는 언제 오게 될까. 혹시 오지 않으면 시무룩해지기도 하지. 당분간은 사장님이 실망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오늘은 추로스를 두통 먹은 날이지만 집에 와서 저녁을 먹은 후엔 고디바 다크 초콜릿 케이크를 먹었다. 엄마 생일 케이크의 마지막 조각을 온 가족이 나누어 먹었다. 한동안 기념일이 없으니 홀케이크 먹을 일이 없다는 게 벌써 아쉽다.     


지난가을부터 눈가 피부가 아토피로 추정되는 ‘무엇’에 시달리고 있다. 안과 선생님은 알레르기 비염이 심해져서 그렇다고 하지만 약을 넣어도 완전히 증상이 사라지지 않아서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야 한다. 이런저런 원인을 찾아보고 조치를 취했지만 소용없었다. 예를 들면 적어도 10년 동안은 한 번도 열어보지 않은 오래된 책들을 대거 정리했다. 수 십 권을 버렸지만 ‘무엇’의 원인은 아니었다.      


다음으로는 혹시 지난가을부터 많이 먹고 있는 간식들. 슈퍼에서 사는 과자들을 비롯해 추로스 때문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다행히 추로스를 먹기 전에 시작된 증상이라 안심하게 되었다. 그다음에는 면역이 약해진 것 아닐까 생각하고 그렇다면 장 건강을 더욱 신경 써야지! 하고 무려 300억 유산균 영양제를 주문했다. 확실한 효과가 있지는 않았지만 장 건강은 중요하니까 뭐.     


벌써 두 번을 다 다녀왔지만 이번 주에 한 번은 더 추로스를 먹으러 갈지도 모르겠다. 신기하게도 추로스는 혼자 먹을 생각이 들지 않는다. 마치 회사원 시절 점심 식사 후에 꼭 둘이 하나의 쿠키슈를 나눠 먹 때처럼, 둘이 추로스 통에서 하나씩 번갈아 꺼내 먹으며 수다를 떨어야만 맛있다는 생각이 든다. 부디 우리가 추로스에 흥미를 잃게 되는 시기가 비슷하기만을 바란다.      


오늘 이렇게 추로스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정말로 써야 할 글을 쓰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마감을 정해둔 것도 아니고(마감이 있지만 못하면 벌금을 내면 되니까) 혼자 정한 프로젝트인데 전체 구성을 잡다가 멈춘 상태로 시간을 끌고 있다. 곧 구성을 잡고 첫 번째 꼭지를 써야지. 하고 다짐한 채로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고, 그러다가 결국 추로스 얘기만 하게 되었다. 그래도 혹시 아직 요즘 은근하게 유행하고 있는 추로스를 아직 맛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권해보고 싶다. 갓 튀긴 밀가루의 맛. 그리고 다음 달엔 꼭 프로젝트를 시작해 보자고 또 다짐한다. 불끈. 그 사이에 진짜 추로스를 먹으러 스페인에 갈 수 있게 된다면 더욱 좋고.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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