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nderPaul Mar 15. 2024

잘 봐, 언니들 인생이다.


우리 교회에 새 친구가 왔어. 그래서 언제 처음 예수님을 알게 되었는지 물었더니

"내가 6.25 때..."

새 친구는 아흔을 바라보고 계셨던 거야.


얼마 전 Y가 해 준 이야기다. 아흔이 가까운 새 친구. 귀엽다. 우리는 그날 언니들 사이에 있을 때의 기쁨에 대해 한참 이야기 했다. 막내라 자연스럽게 귀염둥이 포지션이 되는 것도 좋지만 인생의 허다한 풍파를 거쳐온 언니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내공이 좋다는데 둘 다 공감했다. 우리 성가대 언니들도 녹록지 않은 인생의 풍파를 정면으로 돌파하면서 쌓은 내공이 느껴지는 말들을 툭툭 던질 때가 있다. 무림 고수의 기운이 작정하고 하는 진지한 말이 아 일상어 속에서 느껴진다. 어릴 땐 몰랐던 감정이다. "이런저런" 세월을 어떻게 살아내셨을까. 그런 언니들 사이에서 예쁨 받는 일은 기분이 좋다. "나는 둥둥이 옆 자리가 제일 좋아." 같은 말을 들으면 하찮은 내 어깨도 잠시 우쭐해진다.


작년에 읽은 책 중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는 누굴 만날 때마다 추천했다. 그 책을 읽게 된 것은 인상적인 표지 디자인 때문이었다. "나쁜 일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도망가지 않았다."라는 카피 아래 허리춤을 잡은 언니의 어깨 사진. 서사가 있는 뒷모습을 봤는데 어떻게 사지 않을 수 있을까.


나를 홀린 카피는 이 책의 첫 번째 주인공 정애 언니의 말이었다. 남대문 시장에서 20년 동안 국수를 만드는 큰 언니. 책을 읽는 동안 누구보다 치열하게 일했지만 시대의 한계와 편견 때문에 "일 하는 여성"으로 인정받기 어려웠던 언니들의 이야기에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그 시절을 관통하며 안팎으로 고강도 노동을 이어온 언니들의 삶은 마치 큰 바위 얼굴처럼 우러러볼 수밖에 없다. 그 책을 읽으면 자연스레 엄마 생각을 했다. 명함만 없었던 엄마의 인생에도 경의를 표했다.


최근 만난 H가 어차피 상황은 변하지 않을 테니 내가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나라고 답이 있을까. 우리는 서로 답을 모르는 채 한숨을 쉬는데 이런 일들을 수두룩하게 겪어낸 언니들은 대단하다니까. 이번에도 엄마는 어땠는지 생각해 본다. 당장 잠 못 이룰 만큼 힘든 일이 있을 때도 엄마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 희망의 꼬투리를 끄집어내서 손톱 끝으로라도 간신히 잡고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사소한 작은 일에 웃으면서 야금야금 버텨낼 힘을 삼킨 것 같다. 안다고 해서 따라 할 수 있을까. 글쎄.


헤어지면서 H는 우리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좋겠어. 어떤 좋은 일이 생기면 꼭 공유해 줘. 하고 말했다. 익숙한 말이다. 친구들과 자주 주고받는 말이니까. 영화 데드풀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인생은 괴로운 연속극이고, 행복은 짧은 광고와 같다. 지금은 정규 프로그램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우리에겐 지금 짧은 광고가 필요하다.


방법을 잘 몰라서 더디가 움직이는 우리도 20년쯤 지나고 나면 뒷모습의 어깨가 멋있는 언니가 되어 있을까. 그날 Y에게도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를 추천했는데 당장 도서관에서 대출하겠다고 했다. 언니들의 인생은 이렇게 우리에게 유익하다. 그런 언니들의 뒷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뭐라도 답을 찾지 않을까. 이번 주 성가대 양 옆에 앉으시는 언니들을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 휴대용 가방 걸이인데 내 거 사는 김에 두 개 더 샀다. 언니들, 기다리세요. 막내가 야무진 거 들고 갑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코로나 피서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