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하늘에서 양동이째 들이붓는 비였다. 돌풍까지 합세해서 퇴근도 못하고 가게에 고립되는 건 아닌지 슬쩍 걱정도 했다. '그래도 가게 안에 식량과 물, 노트북과 책이 있으니까 괜찮아.' 경비 아저씨들이 건물을 살피느라 바람길이 그대로 보이는 심난한 머리 모양으로 돌아다니고 있었고 옆 가게 엑스 베너는 진작 나뒹굴어 덜컹덜컹 소리를 냈다. 곧 진정된 걸 보니 주인 여자나 경비아저씨가 정리한 모양이다. 복도 맨 끝자리 세무사 아저씨는 사무실 걱정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화장실 가는 길에 대찬 바람이 아무 데나 뒤흔드는 소리를 듣고 '어차피 오늘 손님 받기는 글렀구나.' 짐작했다. ‘공포’ 냄새 풍기는 건 뭐든 손도 안 대는 쪽인데 오늘처럼 을씨년스러운 날 손님도 없을 가게에서 대범하게 정유정을 들었다. 어제 책장 앞에서 내일 큰비가 있다는데 뭘 읽을까 하다가 정유정을 골랐다. 폭우 쏟아지는 여름이라면 당연하다.
내 심장을 쏴라, 종의 기원, 7년의 밤, 28, 진이 지니... 내일은 폭우니까 ‘7년의 밤’이다.
다시 읽어도 역시는 역시다. 소설은 나를 쥐고 정방향으로 내달렸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를 더 내고 싶었지만 또 늦추고 싶을 만큼 숨 가쁜 플롯. 빈틈없이 직조된 세계. 중간중간 손님들이 맥을 끊어주지 않았다면 300페이지쯤 가서 완전히 탈진했을 것이다. 빗소리에 일찍 잠이 깨는 바람에 두어 시간 일찍 출근해서 퇴근 후 새벽까지 결국 600페이지에 이르는 소설을 한숨에 읽어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28’을 들었다. 코로나 시즌, 장대비 내리꽂는 날 읽는 ‘28’은 더 오싹하다. 읽고 나면 ‘28’ 이후 왜 ‘종의 기원’이 나왔는지 이해하게 된다. 실제로 작가님은 ‘28’ 출간 후 인터뷰에서 언젠가 사이코패스 주인공의 1인칭 시점 이야기를 쓴다면 질리지 않고 쓸 것 같다고 인터뷰한 적이 있었지.
‘28’도 ‘7년의 밤’과 마찬가지로 한 번 올라탄 독자를 내려주지 않고 질주한다. 영화인 동시에 소설이면서 다큐멘터리인 듯한 이야기에 숨차게 끌려가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이다. 서울 근교 인구 29만의 중소도시 ‘화양’에 퍼진 사상초유의 인수공통 전염병, 일명 ‘빨간 눈 괴질’로 인해 무너지는 인간성과 파괴되는 사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28일. 기본 설정과 흐름이 당연히 코로나를 연상하게 만든다. (물론 상당 부분에서 그날의 광주가 연상된다.)
작가님은 주인공은 욕망과 함께 마음속에 자기만의 지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욕망을 이루지 못했을 때 잃을 것이 무엇인가. 그에 대한 해답이 흡인력을 갖지 못하면 이야기는 다시 써야 한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이전의 생활로 돌아간다로 끝나는 이야기는 굳이 쓸 이유가 없다. 잃을 판돈이 커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28’도 벼랑 끝에서 시작하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코로나를 이야기하면서 한 사회학자는 분노와 불안을 구분해야 하는 시대라고 했다. 분노를 들춰보면 사실 불안일 때가 많다. 그 불안의 뿌리를 짚어주면 분노를 다스릴 수 있다. 이건 꽤나 점잖은 분석이고 그 불안과 분노가 구분할 여유와 필요 없이 뒤엉켜 폭발해버리는 상태가 ‘28’ 안에 있다.
올초 대구에서 폭발적으로 코로나 19 확진자가 늘어날 때, 그 상황이 극단으로 치달았다면 화양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으로 빠르게 분노를 폭발시킬 대상을 찾는다. 사실과 진실의 묘한 경계를 가르지 못하고 희생 제물을 찾는다. 코로나가 번지면서 유럽 몇몇 국가에서 묻지 마 폭행과 모욕적 인종차별을 당한 한인들의 기사들처럼.
소설에서처럼 불안이 극도로 커질 때 인간이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코로나 때문에 여름 휴가지에 버려지는 애완동물이 그렇게 많다는 기사를 봤다. 누군가의 사랑받는 ‘아들, 딸’이었는데 순간 죄책감 없이 버리는 인간성은 이미 무너진 것 아닐까. 소설은 인간의 악에 가장 매력적으로 현미경을 댄 것처럼 묘사한다. 바이러스가 위험한 것은 신체를 위협하기 때문일까 정신을 먼저 무너뜨리기 때문일까. ‘28’은 극한의 상황에서 결국 인간을 죽이는 게 바이러스가 아니라고 말한다. 실제 주인공들 중 누구도 ‘빨간 눈 괴질’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인간 존재의 타당성을 모든 생명체에 적용할 때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작가님의 말에 동의한다.
무슨 객기인지 소설을 덮은 후 영화 ‘감기’를 틀었다. 객기가 맞았다. 초반 몇 분 보고 부대껴서 내리고 볼만한 수위로 정리해준 '방구석 1열'로 대신했다. 신기하게도 ‘28’과 ‘감기’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상황을 다룬 작품으로 공개됐다. (‘28’도 영화 판권이 팔렸다고 했는데 ‘감기’가 개봉해버려서 결국 제작되지 못한 건지 궁금하다.) ‘감기’의 도입부에서 외국인 노동자 밀입국 상황을 매개로 설정한 것 역시 ‘28’의 주제 의식과 비슷한 맥락이었을까.
소설의 마지막은 ‘서재형, 인간 없는 세상으로 가다.’라는 비문으로 끝난다. ‘28’에 어울리는 단 하나의 결말이다.
아침저녁으로 카페 안 식물에 분무질을 한다. 어제는 몸짓이 여물지 못해 몬스테라 가지 하나를 심하게 꺾었다. 순간 내가 더 놀라서 가지를 확 끌어안았는데 마치 몬스테라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한동안 이리저리 살피고 잎을 만지다 놓았는데 다행히 가지가 부러지거나 상하지는 않았다. 소설의 힘이란 이렇게 즉각적이다. 존재의 타당성을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창조세계에 적용하려면 섬세한 속도로 다가가는 조심성이 필요하다. 오랜 학습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생뚱맞은 결론이지만 언젠가 혹시 두 마리 개를 키우게 된다면 꼭 ‘링고’와 ‘스타’로 이름을 지어야겠다. 개털 알레르기 비염인에겐 어려운 일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