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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Dec 17. 2019

오래된 시

얼마 전 오랜만에 마음에 두었던 시집을 샀다. 매일 두 여편의 시를 읽으며 귀를 씻는다. 짧다고 후루룩 읽는 건 무례하니까 몇 편을 천천히 읽고 책갈피를 끼운다. 사실은 애쓰지 않아도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다. 오래 매만진 시어는 사이가 넓어 애쓰지 않아도 느려진다. 한 단어씩 곱게 살핀 후에야 다음 시어가 눈에 들어온다. 시를 읽는 즐거움은 의미를 읽는 재미인데 외국의 시를 볼 때면 시인이 최초에 의도한 의미 중 일부만이 희미하게 남은 것 같을 때가 많다. 외국어로 번역하기 가장 어려운 것이 시(詩) 일 텐데, 번역본에 따라 결과 의미가 달리 느껴지니 원문을 그대로 느낄 수 없는 아쉬움이 크다.


시에 대한 오래된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때는 동시 짓기 대회가 있었고 암송대회를 위해 여러 편을 외우기도 했다. 사춘기에는 큰 결심 없이 시가 뭔지도 모르고 시를 썼다. 가끔 잡기장이나 날적이에 자작시를 써놓던 동기 남자애는 스무 살 넘어서도 시를 쓴다고 친구들 사이 농담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 친구가 쓰던 ‘별 이야기’라는 닉네임이 특히 자주 놀림거리가 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단짝 친구와 시 노트를 교환했다고 했다. 내 여고시절에도 시는 멀지 않았다. 우리 세대 사춘기에 유행하던 시들이 있었다. 가을이면 반드시 끄적여보는 시가 있었다. 읽을 때마다 행간에 채우는 것이 달라져 시는 질리지 않았다. 그때 읽던 어떤 시인은 이제 읽지 않는다. 시가 늙는 속도보다 내가 빨리 변했는지도 모르지.  



시집이 100만 부 팔리던 90년대 비하면 시를 읽는 사람은 얼마 없고 공짜로 소비하는 사람은 많아졌다. 인스타그램 사각 화면에서 시어(詩語)가 휘발된다. 시는 그저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닌데 하물며 작은 화면 속에서 쉽게 소비되는 건 쓸쓸한 일이다. 가끔은 시를 아득히 멀게, 고귀하게만 여기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이돌 덕후임을 즐거워하고 프랜차이즈 커피점에서 밤새 작업 한다는 시인 덕분에 시를 조금 편하게 느끼게 된 것을 고맙게 여기고 있다. 시인은 시대의 카나리아 새라는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친구도 있었다. 시대를 노래하지 않는 시인은 죽은 시인이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가끔 시를 읽는 나는 모든 이야기를 귀담아듣기만 했다.


소설은 깨끗하게 읽는 편이지만 시집에는 밑줄을 긋는다. 이유는 뻔하다. 그때 멈췄던 시구와 지금 멈추는 시구가 다르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그때 모르던 의미를 이제는 알까 싶어. 스스로 너무 각박하게 산다 싶을 때 시집을 꺼낸다. 오래 잊으면 안 되겠다 싶어 시를 읽는다. 소설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기도 어렵지만 같은 시를 읽는 사람을 만나기는 더 어렵다. 서로 잘 안 읽는 편이니까. 그래서 오히려 쉬울지도 모르고.   


TV에서 25년 전 드라마를 다시 해주는데 극 중에서 윤여정 님이 매일 시를 외운다. 어릴 땐 엄마가 시 몇 편은 외울 줄 알아야 한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요즘은 시를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는 듯하다. 시를 읽다 보면 외워두는 게 유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 직장에선 시를 써서 사내 메일로 보내시는 분이 있었다. 한 번은 직접 출력해서 사무실을 다니며 나누어주시기까지 했다. 애석하게도 썩 공감하기 힘든 시라 한 번도 진중하게 읽지 않았다. 시를 쓰면서 본인이 행복하셨으면 충분하지 뭐. 어른은 이렇게 노력해도 누군가의 마음에 시를 담기 힘든데 아이들은 힘쓰지 않고도 시 같은 말을 한다. 아이들의 말을 들으면 시를 읽을 때처럼 마음이 말갛게 떠오를 때가 있다. 말을 배우고 얼마 안 된 아이들은 그런 말을 툭툭 던진다. 동화 속 행복한 왕자처럼 제 몸의 보석을 한 시기에 다 쏟아내고 빛나는 것이 다 없어지면 어른이 되는 것처럼, 예쁜 말을 하다가 곧 어른이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시가 필요하단 생각이 지금 막 들었다. 문득 '산다는 게 꼭 누가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것 같았다.'는 심보선 시인의 시 한 구절이 스친다.  


몇 권 안 되는 시집들을 꺼냈다가 잠들기 전에 옛 시인의 시 한 편을 조용히 포개어 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의 상상의 날개를 타고서,

비록 둔한 두뇌가 얽히고 더디게 하지만

벌써 그대와 함께 있노라! 부드러운 밤이여,

때 마침 달의 여왕께서, 선녀 별들에 둘러싸여

옥좌에 앉아 있네


-존 키이츠, 나이팅게일에게 부치는 노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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