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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Apr 15. 2024

망한 여행 회고록

모든 여행이 다 좋았던 건 아니다. 망한 여행의 공통적인 문제는 여행지가 아니라 동행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착각이었다. 나중에 "그럴 줄 몰랐지."라고 해봐야 뭐 해. 친구들과 망한 여행 경험담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우리 중 누구도 망한 여행의 기억이 덮인 여행지를 다시 찾지 않았다. 어쩌면 동행, 착각보다 더 나쁜 실수는 지나친 배려였는지 모른다. 안 되는 건 안된다, 싫으면 싫다 바로 말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한 말이 목구멍을 돌아 머릿속으로 돌아가 나쁜 생각으로 박혔다. 그때 박힌 나쁜 생각들은 잘 없어지지도 않고 질기게 남았다.


그럭저럭 나와 비슷한 사람들만 사귄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나와 많이 다르지만 잘 맞는 사람도 있고 나와 너무 달라서 점점 멀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여행이 아니라면 몰랐을 사실이었다. 고칠 점을 바로 말해주는 게 잠깐은 기분이 상하더라도 좋은 여행과 좋은 관계에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것도 여행에서 배웠다. Noemi 잘 있니? Noemi는 그런 기술에 능숙했다. 덕분에 나는 여행이 끝난 후 그녀를 아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생각이 난 김에 오랜만에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왔다.


작은 말싸움이라도 하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하루도 없지만 용케 망하지 않고 두고두고 이야깃거리로 남는 여행은 역시 가족 여행이다. 끄라비는 우리 가족의 첫 해외여행이었고 가장 사랑하는 여행이 되었다. 엄마는 여전히 한 달에 한 번씩은 그때 이야기를 한다. 맛있게 먹고 즐겁게 놀고 많은 사진으로 시간을 박제했고 작정하고 간 김에 아쉬움 없이 놀고 즐겼다. 이 맛에 돈 벌지 싶었던 여행이었다.


더 빨리 이런 여행을 했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남아서 1년 만에 다시 폴란드로 떠가게 만든 여행이었다. 가족여행이 절대로 망하지 않는 이유는 서로 불만을 바로바로 뱉어내면서 아웅다웅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슨 말을 해도 결국 다 받아주는 사이니까.


하나도 싸울 일이 없는 여행도 많다. 좋았던 이유가 꼭 그것만은 아니었지만 버섯머리와 떠난 제주 여행은 손꼽을 만큼 좋은 여행이었다. 어릴 때부터 유치원 견학이며 교회 수련회, 여름 피서까지 수없이 같이 다녔지만 성인이 되고는 둘이 떠난 첫 여행이었다. 메모리 카드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사진이 거의 남지 않았지만 둘 다 별로 아쉬워하지 않았다. 충분히 재미있게 놀았는데 사진 좀 없으면 어때.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그런 건 가보다. 행복했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더 많은 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며칠뿐인 여행을 다녀와서 몇 년은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심지어 망한 여행까지도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된다. 아니, 망해서 더 오래 마음으로 이야기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작년까지 우리 가족은 다음 여행 계획에 종종 들뜨곤 했다. 코로나 때문에 차곡차곡 쌓인 가족 여행 적금을 열어보면서 어디든 떠날 수 있다는 설렘을 즐겨. 너는 어디 가고 싶어? 여기는 이 호텔이 좋대. 가면 뭘 먹을까. 같은 이야기를 거실에 나란히 누워서 종알거렸다. "엄마랑 너는 면세점에서 선글라스를 하나씩 사." 엄마는 진작부터 다음 여행을 갈 땐 선글라스를 하나 꼭 사고 싶다. 새로 산 선글라스를 끼고 화사한 옷을 입고 좋은 자연광을 받으면서 사진을 찍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지난여름 그 바람을 이루고 말았다.


이제 다시 새로운 여행을 상상한다. 어디로 떠날지, 어떤 호텔에서 어떤 조식을 먹을지까지 물놀이 장비는 어떤 걸로 준비할지 상상한다. 심지어 어떻게 싸우게 될지도 상상한다. 망랑말랑 하면서도 절대 망지 않는 여행.


결국 망지 않는 여행의 비법은 잘 싸우는 것, 견고한 신뢰란 생각이 든다. 돌아보니 망한 여행에서 잘 싸우지 못했던 이유는 당황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내가 알던 당신이 아닌 것 같은 상황에 당황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지금 떠올려봐도 똑같다. 그러니까 당황해서 망한 여행이네. 충분한 신뢰가 없어서 당황했을까. 민망하지만 내가 망친 여행도 있다. 그땐 내가 당황시켰겠지. 내가 이상했어. 미안해. 쩝.


이제 나이를 먹은 만큼 친구들과 떠나는 여행도 쉽지 않다. 결국은 또 가족여행이 남는다. 가족여행 중 싸움을 줄이기 위한 서로의 신호들을 잘 기억하고 지금 상상 중인 언젠가의 가족여행은 더 잘 싸우는 여행으로 만들어 봐야지. 웃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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