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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Jul 15. 2024

끌림을 찾는 떨림

좋아하는 박찬욱 감독 수상소감이 있다. 자신의 영화 설국열차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라며 "오랫동안 닫혀있어서 벽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문이었다."를 언급하면서 새해에는 모두 자신만의 문을 찾으시길 바란다고 했다. 사유가 깊은 사람은 좋은 작품을 만들지만 좋은 말을 한다.


사람은 뇌는 나이가 들수록 노력하지 않으면 이미 결정된 테두리 안에서 사고하게 되고 그 범위가 점점 축소되기 때문에 보수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비단 뇌뿐일까. 생각도 일도, 행동, 태도, 감정, 모든 것이 다 그렇지 않을까. 한계를 넓히기 위해 둘러진 막을 밀어내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점점 우물 안에, 아니 찻잔 속에 갇히게 될지도 모른다. 특히 나는 익숙함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지.  그래서 요즘은 해보지 않은 일에 조금 불편하고 어색하더라도 부딪혀보는 중이다. 덕분에 상당한 감정 에너지를 쓰고 있지만 당분간은 이렇게 지내보기로 했다. 


여름 맞춤 저녁산책을 하는 김에 동네 공원 탐방을 하고 있다. 최대 왕복 2시간 반 거리 내의 공원들을 찾아다닌다. 동네마다 특성이 다르고 공원의 구성도 다르다. 한 동네에 오래 살면서도 처음 가보는 곳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놀란다. 같은 산을 두고 둘러서 걷거나 사잇길로 찔러 갈 때 느낌이 다른데 지도를 펼쳐보면 사잇길이 어찌나 많은 지 지도앱에서 이 길을 다 파악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그런 길은 애초에 길이 아니었지만 나중에 사람들이 만든 길이다. 통행이 많아서 결국 길이 된 오솔길이 수 십 개다. 걷는 입장에선 큰길 하나보다 작은 길 여러 개가 재밌다.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순간순간 깨닫는 재미가 있다. 


어제는 직선으로 10분이면 갈 수 있는 길을 빙 둘러 걷느라 50분이나 걸렸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걷다가 마음이 끌리는 대로 동선을 바꾸며 걷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마치 광야길을 40년 걸려 이동한 이스라엘 민족 같군.


송도 공원 산책도 자주 하는데 동생은 지도가 없어도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잘 찾아낸다. 신기해서 물으면 항상 "송도는 길이 쉽지. 계획도시잖아."하고 답한다. 그리고 덧붙이지. "머릿속에 지도가 전혀 없구먼." 지도가 있어도 인셉션처럼 공간이 왜곡되는 기분이다. 내 머릿속엔 운동력이 있는 지도가 산다. 


요즘 산책 동선에 공원과 전혀 상관없는 길이 하나 생겼다. 소금빵 때문이다. 그 일대 참새방앗간 같은 빵집인데 처음 먹을 땐 버터맛이 너무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 버터맛에 중독되었다. 첫날 3개만 샀다가 낭패를 본 후로 점점 개수를 늘리고 있다. 그제는 6개를 샀지만 하룻밤도 못 넘겼다.  다음엔 10개를 사야지. 빵 구매의 외연을 넓히는 중이다.


요즘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하나같이 책 이야기를 해서 나는 그 전의 어느 때보다도 빵순이로 대표되고 있다. (그분들이 다 책을 읽으신 건 아닌데, 쩝.) 모든 정체성이 빵순이에게 잡아먹힌 상태인데 친구가 아닌 사람들에게 이렇게 순식간에 나를 각인시켜 버리는 일이 처음이라 당황스럽기도 하고 책에 사적인 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생각에 걱정이 되기도 한다. 다만 나를 소개하는 수고를 덜 수 있어서 편리하기도 하다. 


대외활동 에너지 레벨이 이렇게 떨어져 있는 줄도 사람들을 만나면서 알게 되었다. 그 또한 외연을 확장해야 하는 영역일까. 아직 불명확하다. 지난주에도 몇 시간 회의 끝에 방전되어 버려서 집에 가기 전 편의점으로 달려가(사실 달려갈 수 없었다. 마음만 달렸다.) 아이스크림을 허겁지겁 먹으며 당을 채웠다. 외연을 넓히기란 쉽지 않다. 


외연을 넓히려고 아등바등하는 모든 일은 멀리에서 보면 그저 꼼지락 정도로 밖에 안 보일지 모른다. 나는 긴급처방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애를 쓰고 있는데도. 멀리에선 어찌 보이든 지금 꿈틀대는 이유는 이제 조금 더 먼 미래를 두고 움직여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인생의 장기 계획을 제대로 세워본 적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멀리 보고 오늘을 살고 있을까? 


어쨌든 이제라도 멀리 가보려고, 벽으로 착각했던 문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여기저기 두드리며 밀어내보려고 꼼지락 거린다. 결국 10분 걸릴 길을 50분 걸려 걷게 될지도 모르고 괜히 돌아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한번쯤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냐고 스스로 격려해 본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네. 어휴,  오늘도 냉동실에 넣어둔 빠삐코 하나 먹고 힘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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