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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문을 세게 때리는 소리

by WonderPaul

아토피와 투쟁한 지 2년이 넘어가지만 여전하다. 동생은 이사를 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했다. 주거 환경을 완전히 바꾸는 문제는 내가 함부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동생 말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전전했던 병원 선생님들 잘못은 아닌 거다. 오늘 새로운 피부과를 또 찾아갈 예정인데, 일시적 완화 효과라도 누려보려는 마음일 뿐이다.


여름에 쓰던 핸드크림이 가을에 맞지 않아서 서랍에 넣어두고 새 핸드크림을 샀는데 여행 다녀오는 사이 짧은 가을이 지나버려서, 가을에 쓰려고 샀던 핸드크림도 서랍에 넣고 새 핸드크림을 사야 한다. 핸드크림도 시행착오를 겪는 중이다. 몇 년간 쓰던 핸드크림을 바꿔보려고 유목 생활을 시작했는데 적당한 걸 찾기가 쉽지 않다.

손이 건조하면 기분이 나쁘다. 기분이 나쁜 경우는 또 있는데 어두울 때 눈을 뜨는 건 싫다. 겨울을 좋아하지만 아직 해가 오르지 않아 깜깜한 시간에 눈을 뜨면 ‘이렇게 일찍 일어나서 뭐 하자는 거지.’하고 기분이 나쁘다. 기상 시간은 그대로인데 주위가 어두우니 기분이 나쁘다. 다행인 것은 11월부터 재택근무를 늘려서 기상 시간이 조금 늦어졌다. 기분 나쁜 하루를 시작할 일이 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은 여전히 좋다.


12월에 예상치 못한 일정이 많아졌다. 작년에 직장인 건강검진을 했는데 올해도 대상자란다. 촘촘히 점검하란 뜻이겠지. 안과 정기검진도 가야 하는데 주말 출근도 잡혀있고 토요일마다 성탄절 칸타타 연습도 해야 한다. 갑작스레 ‘나 혼자 시간’이 위협받게 되었다. P도 만나야 하고 버섯머리 부탁받고 태국에서 사 온 물건도 전달해 줘야 하는데, 어쩌지. 아차차 동생 생일 파티도 해야 하지. 늦여름부터 사놓고 읽지 못한 책들은 내년까지 데려가지 않기로 했는데 하필 죄다 벽돌 책이다. 4/4 분기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우선 할 일은, 책장 넘길 때 종이에 베지 않게, 친구들 만날 때 좋은 기분을 유지할 수 있게, 칸타타 악보가 아닌 손에 신경이 쏠리지 않게, 무엇보다 기분이 나빠지지 않게 꾸덕하고 촉촉한 핸드크림을 사야 한다. 여행 갈 때 면세점에서 산 핸드크림도 몇 번 써봤는데 내년 봄을 기약하며 서랍으로 보냈다. 서랍장에 계절을 기다리는 핸드크림이 늘어간다.


여행을 다녀온 후로 여름옷 정리 최최최최종 단계를 마무리했다. 정리하는 데 얼마 걸리지도 않을 만큼 옷이 별로 없다. 나는 우리 집에서 옷이 제일 없는 사람이다. 옷장에 한 번 들인 옷은 함부로 방출하지도 않는다. 예전 사진을 볼 때면 ‘이렇게 옷을 안 사고 있구나.’하고 깨닫는다. 이번 여행 사진도 그럴 것이다. 얼굴을 가리고 보면 모두 한 해에 찍었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어쩌다 보니 대외 활동도 늘어난 김에 12월엔 옷도 좀 사볼까.

글을 완성하기 전에 새 피부과에 다녀왔다. 선생님은 건조한 말투로 “나름대로 처방해 볼게요. 크게 달라지진 않을 거예요.”라고 했다. 저도 알아요. 그냥 조금만 덜 해지면 좋겠다는 거죠. 선생님 말투는 상냥하지 않았지만 츤데레에 치료도 성의껏 해주신다는 지인 추천 때문에 나는 벌써 선생님을 잔뜩 신뢰하고 있다. 이게 바로 믿음의 벨트지.


일관성 없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나를 불안하게 한다. 인생은 대부분 그런 일들로 채워진다는 게 문제다. 이 제품 저 제품 기웃거리다 자꾸 서랍에 넣게 되는 핸드크림 정도의 성가신 일만 생긴다면 참 좋을 텐데. 노력해도 낫지 않는 아토피 정도도 참을 만하다. 올 초 봤던 연극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초반과 후반에 두 번 나온다. "문 잘 닫아줘요. 아니면 바람이 문을 세게 때리는데 그 소리가 싫거든요." 지금도 그 대사를 좋아한다. 중요하지 않은 대사인 줄 알았지만 극의 앞뒤로 나온다면 중요한 대사일지도 모른다.

쌓이는 핸드크림, 새로운 병원, 눈뜨기 싫은 아침.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반복된다면 중요한 신호일지도 모른다. 바람이 등을 때리는 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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