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nderPaul Nov 30. 2024

11월, 어떤 의미들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 나태주, 11월 中 -     


아깝지 않은 11월이다. 아깝지도 않을 만큼 별로였다. 거의 망했다고 볼 수 있지. 금요일 밤이면 한 주 동안 차곡차곡 쌓인 피곤이 꽉 차서 요즘은 ‘나 혼자 산다’도 못 보고 잔다. 토요일도 거의 자고 먹다가 저녁쯤 되면 다음 주 강의 준비를 시작한다. 아토피도 괴로운데 최근엔 입술 포진까지 생겨 병원에 갔더니 선생님께서 ‘이 바이러스는 한 번 몸에 들어오면 평생 안 나가요.’라며 약을 주셨다.  독한 놈. 어째서 나가지 않는 거야. 동생이 어느 날 한포진이 생기더니 내내 고생하고 있는 걸 봐서 그런가 벌써 괴롭다. 피부과, 이비인후과, 안과 회전문을 돌고 있다.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거의 망할 뻔한 11월이었는데 오늘 오랜만에 약속이 있었다. 약속은 언제나 오랜만이다. 점점 더 외출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 오늘도 재밌게 놀고 왔지만 아침까지도 약속이 취소되길 바랐다. 하필 약속 장소가 회사 근처라 출근길을 그대로 밟았다. (끙. 스트레스 두 배.)     


12월의 시작은 늘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한 해가 겨우 한 달 남았다는 사실이 얼떨떨하다. 성가대에서는 크리스마스 칸타타 준비를 시작했고 12월 마지막 예배를 위한 찬양 연습 시작했다. 한 해를 정리하는 기분은 그럴 때에야 실감한다. 그러지 않고서야 내 일상은 12월 31일이나 1월 1일이 다를 게 없으니까. 나이 하나 늘어나는 기분만 묵직해진다.      


오늘 만난 선배가 말했다. “나는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거란 기대가 없어. 그래서 오늘 최대한 행복하게 사는 게 목표야.” 북유럽 사람들과 비슷하다. 너무 슬퍼하지 마. 내일은 더 나쁠 거야. 그러니까 오늘 행복 하자.  배우고 싶은 마음이었다.

 

오전에 새로 주문한 오븐이 도착했다. 날이 추워지니까 자꾸 스콘 생각이 나는데 나는 아직도 내가 만든 스콘이 제일 맛있는 사람이라 겸사겸사 오븐을 새로 샀다. 예전 오븐은 너무 작아서 스콘을 많이 구울 수 없기도 하고 오래돼서 온도조절도 엉망이었다. 하지만 요즘처럼 피곤하고 할 일이 많아서야 언제 스콘을 구울 틈이 있을지 모르겠다. 평일에는 퇴근 후에 저녁을 먹고 잠깐 쉬다가 수업 준비를 하고 잠이 들고, 주말은 뭐. 외출하기 점점 더 싫어질 만도 하다. 스콘 구울 시간도 없는데 외출은 무슨.      


오늘 만난 사람들도 어느새 알고 지낸 지 20년 가까이 되어 가는 사이다. 자주 만나지 못해서 이렇게 모두 모인 지도 최소 5년은 넘은 듯하다. 그런데도 약속이 취소되길 바랐다니 내가 못됐네. 다 같이 얼굴 본 지 그렇게 오래되었는데 오늘 들은 말은 “둥둥이는 여전하구나.” 와 “내가 널 그렇게 몰랐다니.”였다. 서로 이질적인 말이라 기분이 묘했다. 5년 전 나와 지금 내가 얼마나 다른 걸까. 무엇이 똑같을까. 나는 답을 좀 알지.      


연말이라고 아쉬울 건 별로 없지만 강의가 겨우 3번 남았다는 게 아쉽다. 모든 처음처럼 이번 학기 강의도 그런 거겠지. 어떤 날은 조금 덜 아쉽고 어떤 날은 더 아쉬웠지만 아쉽지 않은 날은 없었다. 미안하게도 얼굴 외우기에 지독하게 약한 나는 아직 얼굴과 이름을 다 외우지 못한 학생들이 있다. 한 번은 쉬는 시간에 어떤 여학생이 와서 “제 이름 아직 모르시죠?”라고 물어서 당황했다. 다행히 그 전주에 특이 사항을 기록하고 이름을 외웠던 학생이었다. “알고 있지. 진아.” 진아는 조금 의외라는 듯 웃었고 그날 수업 시간에는 꽤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날 내가 이름을 불러주어서 진아는 하나의 의미가 되었나 보다.  어쩌면 아직도 수업에 소극적인 학생들은 내가 이름을 외우지 못한 탓일 지도 모르지.      


아까울 만큼 대단한 기억도 성취도 없는 올해 나를 부지런히 살게 한 학생들이다. 그 덕에 의미를 입었다. 그러니 남은 세 번의 기회가 다하기 전에 이름을 다 외워보자. 헷갈리는 몇몇 얼굴들을 외우도록 노력해 보자. 다 외우고 마지막 수업을 마치면 곧 크리스마스다. 내가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었던 특별한 날. 나는 여전하고도 알 수 없는 의미로 새해를 맞이하게 되겠지. 그럼 새해엔 날이 여전히 추울 때 스콘도 구워보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