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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을읊다 May 19. 2024

꿈이 근처를 서성일 때 나타나는 징조들

징조 1. 

이동진 평론가의 유튜브를 꾸준히 보고 있다. 최근에는 김중혁 작가와 함께 한 <작가가 주인공인 영화로 보는 '작가의 세계'> 편이 올라온 것을 보았다. 김중혁 작가와 이동진 평론가는 이전에 <영화당> 채널과 <빨간 책방>에서도 호흡을 맞춘 바 있어, 두 사람의 케미는 역시 믿고 볼만했다. 1시간이 넘는 영상이지만 전혀 지루한 느낌이 없었다. 작가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세 편을 소개해 주는 본편이 끝난 후, 쿠키 영상처럼 김중혁 작가의 '속마음 인터뷰'가 이어졌다. 그 코너에서 김중혁 작가는 모두가 자신이 가진 이야기가 있고,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작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을 꺼냈다. 각자가 가진 이야기가 채소라면, 실제로 글로 엮는 과정은 거기에 소금과 올리브유를 섞는 것과 같고, 그 결과 하나의 샐러드처럼 작품이 완성된다는 비유가 맛깔스러웠다. 굳이 모든 사람이 작가가 될 필요가 있나 싶으면서도 내가 가진 채소는 뭐가 있더라, 하고 어쩐지 뒤적여 보고 싶어졌다.


징조 2. 

팀원들 1on1을 하면서 희망자에 한해 커리어 개발을 위한 좀 더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전에 읽은 책이나 다른 워크숍에서 얻은 지식을 토대로 질문지를 만들어서 팀원에게 전달해 주고, 팀원이 그 질문에 답한 내용을 바탕으로 구체화하는 방식이다. 첫 단계로 일을 하는 목적과 가치관을 찾아보기 위해 꿈꾸는 일에 대한 질문을 드렸는데, 한 분이 창작을 주요 키워드로 가지고 왔다. 만약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것이고 먹고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면, 하고 범위를 좁혀 보니 그분은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무척 실력이 좋고 지속적으로 학습하는 개발자라서, 개발을 천직으로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다. 동시에 무척 반가웠다. 어떤 소설을 재밌게 봤는지, 어떤 소설을 추천해 주고 싶은지, 그리고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그런 질문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여기(=회사)'에서의 일은 아니므로 속으로만 삼켰다. 그래도 자꾸 마음속에 질문이 맴돌았다. 어떤 글을 쓰고 싶으냐고.


징조 3. 

'오키로북스'의 워크숍을 새로 신청했다. 김호 작가의 <What Do You Want?>라는 책을 기반으로 3주 동안 진행되는 워크숍이다. 매일 워크숍 과제로 주어진 질문에 답을 해보고 있는데, 질문이 하나같이 녹록하지 않다. 함께 대화를 하거나 시간을 보내면 나의 세계가 확장되는 사람이 있는지,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이며 거기에 얼마나 시간과 돈을 쓰고 있는지 등, 깊이 생각해 봐야 답할 수 있는 질문이다. 지난 수요일에 받았던 질문은 '10년 후 오늘에 대한 이야기를 써주세요. 10년간 여러분이 노력해 온 결과물이 이 날 나타납니다. 그날의 감격과 감사함을 적어주세요.'였다. 10년 후의 나는, 하고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문득 어떤 장면이 너무나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작가가 되었고, 다른 나라에서 독자와의 만남을 갖고 있었다. 일단 그 장면이 떠오르자 그 공간의 온도와 조명, 낯선 언어가 퍼지는 마이크의 울림,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따스한 미소마저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본' 장면을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써내려 갔다. 물론 그건 상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 세계가 뜨겁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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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세상이 네가 꿈꾸던 것은 작가가 되는 거잖아, 하고 걷어 차기라도 하는 것처럼 온갖 신비로운 징조(?)들이 내 삶에 나타났다.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모르겠다며 오래 고민하던 것에 대한 답일까. 하고 싶은 일은 없어도 사실은 되고 싶은 것이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의 나날이다. 생각해 보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눈에 뭔가가 밟혔는데, 먹고살기 위해 힘껏 꾸려온 나의 삶을 흔드는 것이 못내 무서워서 자꾸 외면해 왔던 것 같다. 쓰고 싶은 것이 없다며 미루고, 글 써 본 지 오래돼서 이제 엉망이라며 치우고, 어차피 써봐야 누가 읽어 주겠냐며 묻어 버린, 쓰고 싶은 마음. 나 아직 살아 있다면서 관뚜껑 열고 돌아왔으니, 일단 흙 좀 털어주고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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