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우리나라와 14년간 전쟁 중인 나라 사이에서 피어난 러브스토리
'내일'이라는 단어가 일상에서 사라졌을 때 그 자리를 메꾼 것은 공습 사이렌이었다. 계엄정부는 참기 어려운 그 요란한 소리를 내는 확성기를 14년의 전시 기간 동안 용케도 꾸역꾸역 곳곳에 설치했다. 그래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공습 사이렌이 울렸고 우리는 그때마다 벙커로 숨어들었다.
비록 미사일의 폭음과 진동은 벙커 안에 있는 우리의 몸을 흔들었지만, 최소한 그것은 지금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우리에게 공습 사이렌은 '오늘의 뒤에 내일이 있음' 그 자체였다. 가끔 사이렌이 채 울리기도 전에 미사일이 떨어지면 그것은 곧 탄착지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내일'이 없음을 뜻했다. 그날의 공습 사이렌을 끝까지 듣지 못한 사람은 영안실의 냉동고 속에서 내일을 맞이해야 했다. 물론, 죽은 채로.
방금 다시 한 차례의 공습 사이렌이 울렸고 또 끝났다. 이번에는 그것이 꽤 길었고 나는 사무실 지하의 벙커에 한참을 숨어 있어야 했다. 지하 깊숙한 곳에 두꺼운 콘크리트로 만든 벙커였다. 공습 경보가 울리는 동안은 통신보안을 위해 휴대전화가 먹통이 되기 일쑤였다. 긴 시간 벙커에 숨어있는 것이 신물이 난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벙커는 오랜 전쟁으로 군데군데 금이 가고 벽 몇 군데는 부분이 무너져 있었다.
그럼에도 굳건히 버텨주는 이 건물이 나는 언제나 신기했다. 벌써 몇 차례는 지붕이 날아가고 창문이 깨진 빌딩이었지만, 1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전쟁은 온전한 일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폐허라는 새로운 공간 속에서 먹고 마시고 살아내는 방법을 익혔다. 처음에는 나 또한 반쯤은 부서졌다가 다시 세워진 이 사무실에서 이런 저런 물자를 수입하고 다시 해외로 되파는 일을 하고 있었다. 사람은 무서운 항상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 전쟁의 와중에도 사람들은 바다 건너에서 수많은 물건들을 들여오고 있었다.
* 전쟁 중인 국가에서 해외 무역업을 하던 주인공이, 공습 사이렌으로 숨어든 벙커에 쌓아두었던 해외로부터의 물건 중에서 편지 한 통을 발견한다. 편지는 적국에서 제 3국을 거쳐 온 편지였는데, 전쟁 발발 전에 적국으로 나갔다가 애인과 생이별한 여자의 편지였다. 주인공은 남자의 행방을 찾아보았지만 이미 공습으로 사망한 후였다. 편지의 내용을 보고 여자가 궁금해진 주인공은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거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러브 스토리. 조금 뻔한 느낌이다.
* 일이 너무 바빠 간신히 썼다. 전업으로 글을 쓰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독자와 출판사에 쫓기는 느낌과, 일에 쫓기는 느낌은 비슷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