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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wad Feb 20. 2020

중간이 없는 동행

시은은 당분간 어디로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있는 명소 없는 명소 다 찾아 봐야 적성이 풀리는 여행을 하는 나와는 달리 그 애는 한 곳에 최대한 진득하게 머물며 요리도 하고 책도 보고 동네 카페에서 죽치고 앉아있는 걸 좋아했다. 평소 같으면 혼자 다녀오겠다고 했겠지만, 요새 마음이 또 어지러운지라 혹여 외롭지 않을까 벌써 걱정이었다. 그러면 나도 그 애와 함께 머무르면 될 것을, 또 가만히 집에 머무르자니 어딜 다녀온 지가 열흘이 넘어가고 있어 좀이 쑤시고 마음도 영 우울한 것이 어디론가 가야할 것 같았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베르날. 시은은 나와 함께 가지 않았지만, 대신 내겐 온세가 있었다. 선뜻 그 애에게 나와 함께 가지 않겠냐고 제안한 건 온세가 아주 편하거나 우리가 가까워서가 아니다. 혼자는 싫었고 온세는 서로의 선을 넘거나 귀찮게할 것 같지 않았으며 내게 우울함과 외로움을 적당히 앗아줄 것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내가 온세를 만나 받은 첫 인상이었는데, 우리의 첫 만남은 불과 사흘 전이었고 두어시간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애를 잘 모르는 채로 함께 베르날로 떠났다. 일찍 도착해 나를 기다리던 온세는 심지어 아침까지 해결했다. 두터운 외투를 입고서 단단한 표정으로 터미널 입구에 서 있었다. 미안해, 늦었지. 아냐, 사람 구경하고 있었어. 경쾌한 첫마디였다. 버스 표를 끊고서 타는 곳으로 갔다. 이게 웬걸. 주말 아침이라 그런지 베르날로 가는 버스 출입구까지 사람들이 서서 타고 있었다. 망설임 없이 타긴 했는데 한시간을 이러고 가야할 게 걱정이었다. 빈 속이라 멀미가 나기 시작했고 앞에는 몸집있는 아저씨가 여유로운 자리를 방해했다. 가는 동안 온세는 힘이 넘쳐 보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재잘재잘했다. 조금 멀미가 나서 대답하기 어지러울 지경이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케레타로 벗어나는 건 처음이다. 첫 여행이 빡센데? 이런 얘기를 하며 버스를 견뎠다.

아침 기온은 8도였지만 해가 나면 금세 더워지는 멕시코라 버스에서 내릴 때 따뜻한 온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우리를 반긴건 자욱한 안개와 심지어 입김이 나오는 쌀쌀함이었다. 낮은 건물 뒤로 선명히 모습을 드러내야할 돌산도 안개 뒤로 제 모습을 감췄다. 두꺼운 외투를 입은 온세는 덜덜 떨면서, 반바지 입은 나를 보고 정말 춥겠다고 했다. 정말 추웠다. 다리가 시려웠다. 긴 바지를 입지 않은 걸 조금 후회했다. 걷다 보면 몸에 열이 올라 괜찮아질거야. 센트로로 향해 산으로 가는 길에 고소한 냄새가 풍겨왔다. 저번에 시은과 마을을 찾았을 때 줄이 너무 길어 사먹지 못했던 치즈빵 냄새다. 저거 사서 아침으로 먹어야겠다 싶었다. 온세는 사양했고, 나는 시은에게 줄 것과 내가 먹을 것을 두개 샀다. 빵을 받았더니 꽤 묵직하다. 하나만 살 걸 그랬다 싶었지만 두 개의 빵이 든 종이 봉투는 이미 내 가방에 있었다.

빵이 생기니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추운 것도 한 몫 했고. 화장실에 가려면 돈을 내야한다는 사실이 어딘가로 들어가고 싶게 만들기도 했다. 돌산 입구에 거의 다 와갈 때쯤 우리에게 식당 메뉴판을 보여주며 아침을 먹고 가라는 식당 직원이 나타났다. 커피를 팔았다. 망설임 없이 들어가서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쓴 커피를 잘 못 마신다는 온세는 카푸치노를 하나 시켰다. 내 커피가 나오고 나서 한참이 지나야 그 애의 커피가 나왔다. 맛이 밍밍하다고 했고 설탕을 넣으니 더 이상한 맛이 난다고 했다. 두 모금 정도 마시곤 그냥 내려두었다. 나는 바닥이 보이게 아메리카노를 다 마셨고, 사온 빵도 허락을 받고 반 정도 먹었다. 줄을 서서 먹을 맛인가 싶었지만 치즈 향이 깊은게 맛은 있었다. 몸이 데워지는 새에 안개가 걷혔다. 바로 뒤에서 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가 나고 그림자가 생겼다. 얼었던 몸이 녹자 마음도 가벼워지는 듯 했다.

산을 오르기 전 온세가 말했다. 나 사실 고소 공포증이 있어. 사람들이 흔히 나는 무슨 병이 있다, 무슨 공포증이 있고 어떤 걸 무지 못 견딘다. 그러면서 하는 말처럼 들려서, 어 나도 높은데 무서워해. 라고 답하곤 말았다. 그런데 올라갈 수록 온세는 정상까지 가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무섭다고. 아래를 향해 뻥 뚫려있는 곳이 나타나면 으레 멋있다고 사진을 찍었는데, 온세는 사진을 찍으면서도 다른 곳을 보거나 눈을 감았다.

등산을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망설임 없이 등산이나 걷는 걸 엄청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건 우리와 첫 대화에서 허물 없어 지기 위한 그 애의 처사였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오르는 걸 힘들어 했다. 다섯 걸음 정도 가선 멈추고 쉬고 싶어 했고, 힘든 기색이 역력하고 숨이 차 오르는 게 보였다. 정상까지 안 가도 좋으니 네가 힘들면 할 수 있는데까지만 가도 돼. 온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온세는 자주 쉬고 싶어했지만 쉴수록 힘들어지는 걸 알기에 나는 계속 오르자고 했다. 그늘이 나오는 곳에서 우리는 겨우 숨을 골랐는다. 내려갈 게 무서워서 더이상은 못 갈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멈춘 곳 다음 부터는 난간도, 줄도, 벽도 아무것도 없는 낭떠러지 뿐이었고 발과 다리의 힘, 팔과 손의 방향만을 믿고 올라가야하는 곳이었다. 한국 산은 대부분 나무가 무성하여 하산할 때도 아래가 잘 보이지 않아 두려움이 덜한데 이 곳은 그저 뻥 뚫려있는 돌산이니까. 나는 온세에게 우리가 갈 곳이 돌산이라는 걸 전날 저녁이 되어서야 일러두었다. 중턱에서 쉬고 있을테니 정상에 다녀와. 나는 다시 혼자가 되어 사족 보행을 하며 산을 올랐다. 한달 전 쯤 시은과 왔을 때 나도 이정도에서 멈추고 시은을 혼자 올려 보냈다. 한참 쉬고 있을 때 시은에게 전화가 걸려 왔었다. 정상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고 여기서 보는 풍광이 어마어마하니 올라오라는 말이었다. 평소 나를 어디론가 먼저 이끌지 않는 시은의 전화라서 그런지 나는 무서움을 무릅쓰고 올랐다. 두려웠다. 온 다리에 힘을 주어도 미끄러질 것만 같은 내리막길이. 하지만 정말 그 애의 말대로 정상은 멀지 않았었다. 그리고 반대 방향의 다른 풍광까지 속속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리막길은 생각보다 수월했었다. 나는 그 때의 희열 비슷한 걸 느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두 번째 등반이라 그런지 쉽게 정상에 올랐다. 그땐 참 멀어 보였는데, 이렇게 쉽게 오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땀 범벅이 된 채로 반팔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 올렸다. 그늘 한 점 없는 곳에서 사람들이 걸터 앉아 쉬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발 아래를 내려다보며 올라왔음을 누렸다. 혼자가 되니 잡념이 차올랐다. 몸이 편해질 때까지만 기다렸다가 엉덩이를 뗐다.

내려가는 길 역시 전보다 쉬웠다. 이미 알고 있는 길이라 어디를 디뎌야 더 안전하고 빠르게 내려갈 수 있을지 계산이 쉬웠다. 앞서 내려가는 사람들은 제치며 달리기 하듯 아래로 향했다. 온세는 그늘에 앉아 휴대용 선풍기로 땀을 식히고 있었다. 무사히 잘 내려왔네. 생각보다 내리막길이 재미있었어. 아래 보이는 풍광을 무시하고 온 신경을 발이 닿는 곳에 집중하다 보니 오래 걸리지 않아 내려왔다고 했다. 그 애가 자긴 이제 괜찮다고 건네준 선풍기를 받아 나도 땀을 식혔다. 목이 말랐고 배가 고팠다. 전에 가보았던 고르디따 집으로 향했다. 멕시코에서 먹은 음식 중 맛있기로 손에 꼽았기에 다시 가보고 싶었다.

가는 길에 전에 사지 못해 미련을 두었던 컵을 하나 샀고, 무용하지만 아름다운 푸른색 돌을 두어 개 집었고 옥색 등딱지가 있는 작은 거북이도 샀다. 친구들에게 선물하고자 책갈피도 여러개 골랐다. 온세는 가족에게 줄 선물이라고 투명한 돌로 만들어진 팔찌를 골랐는데, 정작 자기가 사고 싶은 철제 자전거 모양의 시계에는 미련만 두고 돌아섰다.

식당에 도착해서 미첼라다 한잔과 전에 먹었던 것과 같은 메뉴를 골랐다. 온세는 안전한 맛이 보장 되어 있는 소고기와 계란을 시켰다. 그늘맡에 앉으니 금세 서늘해져 넣어 두었던 외투를 꺼내 입었다. 하지만 온세 손에는 땀이 흥건했다. 다한증이라고 했다. 내가 본 다한증은 말 뿐인 다한증이었나 싶을 정도로 심했다. 오늘 입고 온 옷도 평소 잠옷으로 입는 옷인데, 땀이 나면 늘 닦아 젖기 마련이라 입고 왔다고 했다.

밥을 다 먹고선 화장실을 차례로 다녀왔다. 나도 온세도 위장이 약했고, 외출할 때면 화장실에 갑자기 가고 싶을까봐 두렵다는 마음을 공감했다. 하지만 내 위장은 온세에 비해 튼튼한 것 같았다. 한국에서 가져온 지사제가 사십개가 넘는데, 오늘 아침에도 하나 먹었다는 말에 놀랐다. 배가 아플까 두려워 평소 밖에선 음식도 잘 못 사먹는다는 말에 나는 또 내가 알던 대장의 문제는 문제도 아니었나 싶었다.

중간이 없는 온세와 나와 구경을 조금 더 했는데 더위와 피로에 쉽게 지친 기색이 역력해 버스를 타러 가기로 했다. 현금을 뽑으려 에이티엠기 앞에서 잠깐 줄을 섰다. 수수료가 아까워 뽑지 못하다가 오늘 처음으로 현금을 뽑는다고 했다. 두 개의 기계에서 수수료를 모두 확인하고도 뽑기를 망설이는 그 애에게 약간 질릴 뻔 한 순간 나는 알았다. 온세에게서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있었다. 우유부단하고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하는 내 모습을.

케레타로로 돌아오는 버스에는 다행히 자리가 많았다. 시간이 애매해서인 것 같았다. 다른 도시를 여행했다가 돌아가는 시간 치곤 이른 세시경이었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 금세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느라 피곤했던게 당연하다. 집에 갈 때가 되니 얼굴이 펴지면서, 집순이는 집에 갈 때 제일 행복하다고 말했다. 정상까지 다녀왔으니 더 피곤할거란 그 애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너 역시 산을 올랐잖아. 우리는 같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잘 모르는 나와 스스럼 없이 동행해준 그 애의 선한 표정이 눈에 밟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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