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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wad Mar 10. 2020

로나 심슨의 페미니즘

오랜 시간 지난 후에도 어렴풋이나마 생각나는 작품이 있다. 로나 심슨의 사진이 내게는 그랬다. 지난해 가을, 테이트 모던에서 닷새 예보 (five days forecast)를 맞닥뜨렸다. 단조롭고 정제된 흑백사진이 반복적으로 전시되어 있었는데, 사진 위아래에 배치된 텍스트가 ‘그저 평범한 사진이네’라고 지나칠 뻔했던 나를 붙잡았다. 한 작품 안에서 텍스트의 이미지가 불가분하다는 데 먼저 놀랐다. 자극적이지 않았다. 담담한 가운데 던지는 조용한 울림이었다. 

로나 심슨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지금 이 시대에 그의 작업이 왜 유효하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야기하기 위해서, 작가가 ‘여성의 몸’을 어떻게 표현했는지에 집중하며 이야기해보겠다.

우리가 어떤 담론에 접근하게 될 때 여러 경로가 있다. 지금 시대에 가장 쉬운 건 인터넷이다. 그러나 잘못되고 편협한 정보가 넘쳐나며 특히나 많은 것을 이분법으로 만들어 바라보게 만든다. 한국에서 페미니즘 역시 그런 식으로 재생산된다. 오랜 세월 여성이 주체적으로 사회에 목소리를 내기 위한 노력, 그걸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무지한 사람들이 한국에서 페미니즘을 갈 곳 없게 만들고 있다. 현대에 시각적으로 자극적이기만 한 것은 이미 충분히 차고 넘친다. 이 가운데 심슨의 작업이 내겐 잔잔한 충격이었다.

1900년대, 사진은 당시 영향력 있는 대중매체였다.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작가들이 주의를 기울이고 활용할만한 좋은 매체였다. 우선 대표적인 예로 바바라 크루거가 있다. 그는 사진과 텍스트를 결합해 남성 지배적 구조와 사회적 편견에 저항했다. 자극적이고 예민한 주제를 예술을 넘어 비평적으로 만들고, 대중문화의 한 형태로 일반화시켰다. 로나 심슨과 바바라 크루거는 전통적 구조의 탈피를 주장했으나, 시각적 이미지의 사용법은 다르다. 예를 들어 크루거는 평가 절하된 대중문화와 여성 지위의 연계를 지적했다. 하지만 심슨은 상업적으로 규정하는 이미지의 사용과 흑인의 흑백 이미지가 발생시킬 수 있는 심리적인 폭력을 거부했다.

또 다른 여성 사진가인 신디 셔먼은 사진의 순간적인 해독력에 주목했다. 특정 이론을 바탕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게 아니라 사회의 실질적 이미지에 치중했다. 셔먼은 자기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현실을 반영했다. 자화상을 통해 사진의 객체와 주체로써 여성의 진정한 자아 확립과 주체 회복을 말하며 가부장적 사회가 단지 아름다움으로 규정했던 여성의 신체에 의문을 던진다. 심슨과 비교하자면, 단적인 예로 대표작 <untitled no.96>에서 심슨은 <you are fine>과 같은, 오달리스크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심슨의 사진에서 등을 돌리고 있는 자화상보다 셔먼의 사진은 우리에게 조금 더 성적으로 다가온다. 셔먼은 사진 속 인물 포즈가 패티쉬로서 사진이 어떻게 작용할 수 잇는지 고려했기 때문이다. 크루거와 마찬가지로 작품 안에서 여성의 성적 대상화 가능성과 대중문화 가능성이 여전히 함께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러나 로나 심슨의 작품에는 성을 다루는 많은 사진들이 담고 있는 패티쉬적인 요소도, 스테레오 타입에 따라 드러낸 여성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사진 속 인물은 로나 심슨 자신으로 대변되고 얼굴은 드러나지 않는다. 손과 발, 신체 일부분의 디테일이나 뒷모습이 등장한다. 로나 심슨은 널리 알려진 여성의 역사적 이미지, 보편적으로 흑인의 몸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개념에 저항한다. 단호하게 잘려진 신체의 일부와 뒷모습은 거절하는 자세를 드러내며 무엇으로도 규정될 수 없음을 드러내는 듯하다. 단편화된 신체를 연속적으로 보여주며 단일하고 응집된 내러티브를 피하려한다. 심슨은 흑인 여성을 괴롭힌 스테레오 타입을 꺼렸는데, 서양 수사학에서 흑인 여성의 몸은 병적인 몸, 범죄적 포르노, 중성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상은 억압을 정당화시키고 백인 여성을 위한 통제에도 사용됐다. 모든 흑인을 노예와 같이 천한 이미지로 인식하는 서구의 고정관념이다. 심슨은 이렇게 그대로 드러날 수 있는 것 대신, 심리적 폭력을 피해 여성의 몸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깨려 했고 여성과 ‘구경거리’사이의 연결을 끊고자 했다. 로나 심슨은 1980년대 사진가로 활동하자마자 주목을 받았다. 흑인 여성이라는 것 때문이다. 이 점에서부터 심슨은 크루거와 셔먼과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러한 ‘저항하는 예술’을 통해 기존의 부조리를 직시하는 눈을 갖게 될 것이다. 조금씩 변하고는 있다 해도 이 시대에 부조리는 차고 넘친다. 제도권 권력의 주체가 편향되어 있고 대중문화에서는 아직도 구시대적 고정관념이 여과 없이 그대로 사용된다. 

심슨은 작업을 통해 어떠한 이익을 좇거나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에 끼치는 과거를 이야기하고 자신을 표현하며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탈피할 수 있도록 한다. 나는 페미니즘 담론 앞에서 로나 심슨의 사진, 포토텍스트가 던지는 잔잔한 충격이 다른 작품들보다도 더욱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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