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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촉촉 Aug 09. 2021

좋아해요.. 아무튼

먼-데이 에세이 29. 아무튼

 난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에 대해 동네방네 떠든다. 그는 어떤 취향을 갖고 있고, 어떤 직업을 갖고 있으며 그 사람이 나한테 무슨 말을 했고,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까지...비록 친구들은 조금 힘들어 하긴 하지만, 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들과 함께 알고 싶다. 좀 더 생각해보면, 내가 아는 그 새로운 사실이 너무 신기하고 재밌어서 알리고 싶어하는 것 같다.

 나처럼 굳이 겉으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당신이 무엇인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에 대한 시시콜콜한 것까지 궁금해져서 '그'라는 주제 하에 사방팔방 가지를 펼치며 지도를 그려나갈 것이다. 반대로 내가 알던 세상의 조각들이 '그'라는 중심 아래 재정의 되기도 한다. 내 인식의 레이더가 '아무튼 그'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꼭 인간과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무엇인가 사랑하고, 좋아하게 되면 그 마음이 그쪽으로 향하고, 생각도 그렇게 하게 된다. 아무튼 시리즈의 저자들은 그런 사랑에 치여서 이야기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사람들이다.


 한가지 주제에 대한 한 사람의 애정과 감상을 담뿍 담은 에세이 아무튼 시리즈가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시리즈는 '나를 만든 세계, 내가 만든 세계', '나에게 기쁨이자 즐거움이 되는, 생각만 해도 되는 한 가지를 담은 에세이’라는 슬로건 아래 2017년부터 지금까지 총 44권이 나왔다. 그 내용은 정말 다양하다. 피트니스, 클래식, 바이크 같은 '취미 활동'의 영역에서부터 떡볶이, 술 같은 '음식', 양말, 후드티, 스웨터 같은 '의류', 여름, 식물, 싸이월드 심지어 장국영 까지 그들의 공통점은 화자가 그것을 정말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어떤 것에 통달한 달인들의 이야기는 아니다. 예를 들면 나는 김호경 작가의 【아무튼, 클래식】이라는 책을 갖고 있는데, 작가는 클래식 연주자나 작곡가가 아니다. 물론 클래식 음악잡지 기자 생활을 하고 전공을 하기도 했지만, 그런 전공 지식으로 뽐내기보다는 특정한 감정과 상황에서 클래식 음악이 자신에게 어떻게 위로와 기쁨이 됐는지, 그것을 즐기면서 어떠한 행복을 느끼는지가 서술되어 있다.

나는 사실 클래식에 워낙 문외한이고, 어쩌다 가게 되는 클래식 연주회에선 자기 일쑤인 사람이라 기대를 안 했지만 꽤나 재밌었다. 또 이 책에서 나온 드뷔시의 달빛을 때때로 찾아 듣게 되었다. 아마 사랑을 느끼는 작가의 모습에서 내가 모르던 클래식의 매력을 조금은 느꼈던 것 같다.  

다른 책의 저자들을 살펴봐도 대부분 직업과는 상관없는 순수 애호가의 입장에서 쓴 글들이다. 아마 이 책의 기획자들은 처음부터 이 책을 어떠한 지식을 제공하기 위해 썼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책들은 주제의 역사와 법령, 기타 등등을 읊는 게 아니라 나와 이 주제가 어떻게 연결되었는가, 왜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가를 수줍게 고백하는 글들이다.


이건 직업이나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할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이상이 현실이 되면 깨는 순간을 맞닥뜨리고는 한다. 일례로 나는 예전에 정치외교학과에 가서 외교관이 되고 싶던 적이 있었다. 매체에 나온 외교관의 이미지와, 학교에서 배운 정치 과목에 있는 역사적 사실주역이라는 것이 나한테는 꽤나 매력적이었다. 소위 취업이 잘된다는 경영학과에 들어갔지만, 결국 꿈을 좇아 대학교 3학년 때 정치외교학을 복수전공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정치적 암투는 드라마나 야사를 담은 이야기책에만 있을 뿐이었고, 내가 배우는 것은 말장난 같은 각종 '주의'(ism) 들을 가지고 치열하게 썰로 푸는 학문이었다. 결국 정치외교학 과목들은 듣는 둥 마는 둥 학교를 졸업했었다.

 대학 때 전공으로 선택하면 그나마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폭이 지만, 직업은 더더욱 심각하다. 우리나라처럼 특정 나이에 해야 하는 것들이 정해져 있는 사회에서는 직업이 내 성향이나 이상과 다를 때의 리스크는 크다. 또 심지어 그 일 자체는 나와 잘 맞고 나를 행복하게 하지만, 일외의 사회적 관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명감보다 많은 행정 업무에 지치고, 기자들은 세상의 진실을 알리기 전에 광고주와의 관계를 따진다. 연극 배우는 무대 위에서 연기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지만, 프로덕션의 갑질과 열정 페이에 시달린다. 결국 사람들은 이런 말을 많이 한다. '자아실현은 직업으로 하는 게 아니야. 취미로 하는 거야.' 어쩌면 오롯이 그것만에 집중할 수 있는 관계가 되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직업은 아닐지라도,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나에게서 돈과 시간을 앗아가더라도 그것만을 충직하게 하게 하는, 그 '아무튼 그것'. 내가 그런 충직함을 보이게 되는 '그것'은 무엇일까?

일단 먹을 것? 특히 단 것과 고기. 그러나 특정한 것을 좋아한다기 보단 다 맛있다. 끼니를 스킵하게 되면 화가 나긴 하지만 이게 내 본질적 즐거움 같진 않다.

책? 어릴 때의 나라면 확실히 책을 좋아했다. 심지어 남의 집에 놀러 가서, 친구랑 안 놀고 그 집 책을 읽다 온 적도 있다. 또 고등학교 때는 무협, 판타지 소설에 빠져서 거의 하루 12시간을 연속해서 밥 먹는 것도 잊고 본 적도 있다. 그렇지만 요새는 스마트폰에 빠져서 제대로 독서를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스마트폰이 좋지도 않다. 가십거리에 빠져 스마트폰을 하고 후회하는 내 모습은 한심하기만 할 뿐.

 생각해보면 나에게 남은 것은 연극뿐이다.  연극을 보는 것도, 프로는 아니지만 만드는 것도 좋아한다. 연기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글을 쓰는 것, 연출 밑에서 함께 하는 것도 좋아한다.

 나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고 생각만 해도 되는 것, 나를 만들고, 내가 만드는 세계를 이루면서, 영감을 주며 삶을 지배하는 것, 본질적으로 그것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연극인 것이다.

그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에 퇴사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직업이 되고 나면 그것에 대해 학을 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튼 연극이다.


출처 :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41409240003191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9/07/488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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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데이마다 애'먼' 사람들에게 글을 뿌리는, '먼'가 할 말 많은 사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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