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히도 더운 날이었다. 그날은 이상한 날이었다. 수상하리만큼 평화로웠다. 오지상(おじさん)도 윽박지르지 않았고, 낮밤 가리지 않고, 눈 벌개서 찾아오던 일본 병사들도 잠잠했다. 히미꼬 언니가 엿들은 것처럼 일본이 지고 있다는, 그리고 전쟁이 끝난다는 이야기가 진짜인 것일까. 그러나 그녀는 그냥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여느 아침처럼 위안소 뒤편 냇가에 갔다.
정말 오랜만에 생리가 터졌다. 몸이 무거워서 임신을 한 것은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다행이었다. 피가 묻은 속옷을 가만히 빨았다. 또 병사들이 쓸 사쿠(위생용 콘돔)를 씻었다. 다만 어떠한 재촉도 없었기에 냇가에서 조금 더 천천히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물은 차갑고 깨끗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녀의 발을 헐겁게 감싸던 천 신발을 벗고, 냇물에 발을 담갔다. 앙상한 두발은 상처로 울긋 불긋했다. 쓰라림을 느끼기엔 이미 오래된 상처들이었다. 그냥 참 시원했다. 그녀의 윗옷 주머니엔 마사오 장교가 남기고 간 성냥이 한 갑 있었다. 그녀는 물 묻은 손을 자신의 더러운 천 옷에 스윽스윽 닦고 그 성냥을 가만히 만졌다.
성냥. 그녀는 원래 성냥 공장에 가는 거였다. 그녀의 이름은 희남. 아들을 원하는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나 희남(希男)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경연과 교연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언니들이 부러웠지만, 그래도 한편으론 좋은 점도 있었다. 그녀 다음에 남동생이 태어나, 이름 덕 봤다며 집안 어른들이 추켜세워 주었다. 특히 할머니가 그녀를 참 예뻐했다. 엄마 대신 태몽을 꾼 할머니는 큰 불덩어리가 품 안에 들어왔다며 사내아이가 나올 것이라 장담했었다. 비록 희남이 태어나긴 했지만, 할머니는 "네가 원래 남자 앤데, 네 엄마가 몸 처신을 잘못해서 계집애가 된 거야. 그래도 너는 남자처럼 큰 사람이 될 거다."라고 그녀를 예뻐했다. 과연 남자애가 될 뻔했던 여자가 칭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들판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새까맣게 그을려 오면 아버지는 여자애가 왜 그러냐며 쯧쯧 거렸지만 할머니는 남자애처럼 활달하다며 좋아했다. 또 한참 놀고 오면 밥 한 덩어리 더 챙겨주며 "우리 불덩이" 하면서 예뻐하곤 했다.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자신의 꿈이 맞다는 걸, 저 아이는 원래 남자아이란 걸 며느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희남도 더더욱 남자답게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한지도 모르겠다. 남자애들 사이에서 더 열심히 공부했고, 더 열심히 놀았다. 자신의 이름처럼 그녀는 남자가 되길 희망했다.
그러나 결국 여자였다. 세 살 터울 동생 상연의 소학교 뒷바라지를 위해 희남은 소학교 이후에 상급 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공부도 잘하고, 꿈도 컸던 그녀는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한 편으론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겠단 꿈도 있었다. 열네 살의 희남은 두 살 위 교연 언니보다 한 뼘이나 더 크고 힘도 좋았다. 밖에 나가면 희남을 언니로 보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희남은 남자들이 하는 농사일을 도우며, 자신이 언니들과 가족들을 책임질 기둥 같은 인물이 될 거라고 믿었다. 심지어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 상연이를 다른 누구도 아닌 희남에게 부탁했다. 희남은 집안의 아들 같은 딸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수탈은 점점 심해졌다. 그래도 딸들을 소학교는 보낼 정도로 괜찮았던 희남의 집안은 이제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그때, 같은 동네 길이 아저씨가 집에 찾아와서 자매를 만주의 성냥 공장에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했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군수품 공장이라 대우도 좋고, 아마 상연이의 징집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경연 언니는 결혼 약속이 잡혀있었고, 교연 언니는 깍쟁이에 자기 몸 하나 건사 못하는 잔병치레 대장이었다. 희남은 자신이 가겠다고 나섰다. 힘쓰는 일에는 이골이 났다며 엄마와 언니들을 안심시켰다. "밥은 잘 주겠지! 내가 돈 벌어올게." 아버지는 그저 담배만 뻐끔 피우면서뒤도 돌아 앉아 있었고, 어린 상연이는 눈만 떼구루루 굴렸다. 길이 아저씨는 자매 중 한 명만 데려가는 것이 영 마뜩잖아 보였다. "내가 좋은 데 데려가는 건데. 참. 뭘 몰라. 희남아! 네가 행운아인 줄 알라고"
이야기가 오가고, 채 이삼일이 지나지 않았을 때, 떠날 날짜가 잡혔다. 제대로 된 준비도 못하고, 희남은 바로 떠나야 했다. 기차에서 먹을 주먹밥 한 덩이와 옷 한 봇짐만 덜렁 들고 그녀는 길을 떠났다. 불안했지만 스스로를 다잡았다. '1년만 버티자. 1년 동안 돈 많이 벌어서 학교도 다시 가고, 언니들, 상연이, 어머니, 아버지 맛있는 것도 사드리자.'
그러나 도착한 곳은 낙원위안소였다. 어리둥절하는 조선의 처녀들을 위안소의 주인 오지상은 억세고 빠른 일본말로 윽박질렀다. 그리고 그녀들의 짐을 빼앗고 옷을 벗기더니 지푸라기 침대에 던져 넣었다. 빠져나가려 했지만 곧 일본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총과 칼을 가진 그들은 제발 살려달라는 그녀의 외침을 무시했다. 아니, 오히려 축 늘어진 예전 여자들보다 낫다며 새로운 장난감을 가진 아이들처럼 웃었다. 특히 그들은 희남의 이름을 듣고 즐거워했다. 希男 키난 - 남자들을 희망한다. 위안부의 이름으로 얼마나 좋냐며 희롱했다. 그녀는 제발 이름을 부르지 말라 했지만, 그들은 그녀의 이름을 재밌어했다. 그녀가 불을 낼수록 더 큰 발이 날아와 짓밟았다. 처음에는 꺼지지 않으리라, 끝까지 반항하리라 다짐했지만 어느새 남자들의 손찌검과 발길질에, 나중에는 그저 시늉에도 그녀의 불은 맥없이 꺼졌다. 그 무력감에 그녀 내면의 불덩이는 점점 재가 되어갔다. 언젠가부터는 그 상황을 그냥 받아들였다. 몸을 겨우 가리는 천 쪼가리 옷에 하루에 한 번 나오는 꽁보리밥에 묽은 된장국, 짠지로 허겁지겁 배를 채웠다. 이유없이 살아있었다. 죽지못해 살고있었다. 꿈과 희망을 잊고 아편으로 현실도 잊었다. 그녀를 단골로 찾아오는 마사오는 같은 아편쟁이였다. 그는 그 일을 끝내고 꼭 아편을 피웠다.
냇가에 발을 담그고 성냥을 만지작 거리던 그녀는 어그적 일어났다. 정말 이상하게도 위안소에서 그녀를 찾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불안한 평화였다. 그녀는 냇가에 발을 담그고 걸었다. 냇가는 바닥이 보일 정도로 얕게 흘렀고, 그 안을 걷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느 정도 걷자 철사로 된 울타리가 보였다. 냇가는 철사로 된 울타리 바깥쪽에서 안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철사망 바깥으로 흘러나갔다. 물은 얇은 철사 울타리를 뚫고 나가지만 그녀는 나갈 수 없었다. 뒤를 돌아 위안소 쪽으로 몸을 틀었다. 신발도 없이 터덜터덜 위안소 뒤쪽에 도착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긴 싫었다. 위안소와 관리소 사이 그녀만이 아는 작은 모퉁이로 들어갔다. 그녀는 그곳에 앉아서 발을 끌어당겨 몸을 웅크렸다.
그녀는 추위를 느끼기 시작했다. 아마 아편 기운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추위와 배고픔이 갑자기 강렬하게 그녀를 사로잡았다. 관리소 안쪽에선 일본 놈들이 숨겨놓은 음식의 냄새가 스멀스멀 나는 것 같았다.
찌는 듯한 날씨였으나 손은 동상에 걸린 듯 벌벌 떨리고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추위를 당장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때 성냥이 손에 닿았다. 성냥 하나를 태워서라도 그녀의 손에 온기를 더해줄 수 있다면. 그녀는 벌벌 떨리는 곱은 손으로 성냥갑에서 성냥 하나를 꺼냈고, 성냥을 벽에다 그었다. 성냥은 탁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보였다. 성냥에서 불이 피어오르는 순간, 가족들과 함께 있던 아랫목이 보였다. 할머니가 신줏단지 모시듯 했던 질화로가 보이고 자매들끼리 오손도손 모여 앉아 솜이불에 발가락을 대고 앉아있던 모습이 보였다. 희남의 눈엔 눈물이 고였다. 문득 모습은 사라졌다. 눈앞에는 불이 꺼지고 다 탄 성냥만이 남아있었다.
그녀는 허겁지겁 두 번째 성냥을 켰다. 불이 타닥 하고 타오르자 그녀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녀가 좋아했던 엄마의 밥 냄새였다. 커다란 가마솥에 가득 찬 하얀 쌀밥. 그리고 산에서 직접 캐온 냉이, 달래가 가득한 향긋한 된장국. 밥상 위에는 동네잔치 때나 맛볼 수 있는 지짐이도 있었다. 손때 묻은 앉은뱅이 소반에 소박하지만 엄마 냄새나는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리고 세상에. 엄마가 저기 고깃국을 가지고 이쪽으로 다가온다. 엄... 마 하며 외치는 순간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성냥이 꺼진 것이다.
이제 그녀를 괴롭히는 추위는 없었지만 그녀는 그것들을 다시 보고 싶었다. 성냥을 모조리 그어서라도 다시 엄마를 안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성냥을 모조리 그었다. 열감이 훅 끼얹어졌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열감이 등 뒤에서도 피어올랐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불이야" 동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니 위안소가 타고 있었다. 환상인가 싶었지만 진짜였다. 그리고 총소리가 들렸다. 두두두두두두두. 일본말이 들렸다.
戦争は終わった!(전쟁은 끝났다)
お前らもしんでしまえ(너희들도 죽어버려)
위안소 건물에는 창문이 없었다. 구멍이라곤 앞으로 뚫려있는 문 뿐이었다. 타는 열기와 연기는 더 심해졌고, 총소리와 앞으로 나가려는 여자들의 비명만이 들렸다. 그녀는 아직도 이것이 성냥이 주는 환상인지 진짜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더 있다간 그녀도 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성냥을 버리고 반대편으로 죽어라 뛰기 시작했다. 총소리와 동료들의 비명이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그날이 위안소의 마지막 날이었다.
차가운 겨울이었다. 희남은 병원복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대충 걸친 카디건과 맨발의 슬리퍼는 그녀가 허락을 받고 나온 게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날은 그 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행여나 자신을 버릴까, 내내 붙어있던 옆방 금희 할머니는 오랜만에 가족들의 면회에 신이나 기운을 다 썼는지 일찍 잠들었고, 요양원 직원들 대부분도 가족들과 함께 보내기 위해 문을 잠그고 퇴근한 상황이었다. 희남은 오래전부터 계획해놨던 탈출을 감행했다.
요양원은 어릴 때 만주에서 겪은 그곳과는 달랐으면서도 같았다. 그래서 싫었다. 답답한 그곳을 늘 탈출하려 했지만 그녀의 늙은 몸은 들판을 뛰어다니던 어린 희남의 몸이 아니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 결국 이런 겨울이 되어서야 그녀는 탈출을 할 수 있었다.
거리는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기쁨에 들떠있었다. 시끄러운 노래가 여기저기 들렸고, 반짝이는 간판들이 보였다. 얼마간 정처 없이 걸었을까. 오랜만의 자유에 취해서 느끼지 못했던 추위가 그녀를 사납게 감쌌다. 그녀는 어느 건물 모퉁이에 쭈그려 앉았다. 위안소와 관리소 사이에 앉아있던 어린 소녀처럼 종아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넣었다.
카디건 안에는 그날처럼 성냥이 들어있었다. 그녀는 성냥을 켰다. 성냥 불빛은 하늘에 환한 별처럼 보였다. 그리고 따뜻했다. 잠깐 그녀가 살아왔던 삶이 스쳐 지나갔다. 그날의 탈출 이후, 행여 누가 알까 고향에는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저 먹고살기 위해 보낸그악스러운 삶이었다. 누구도 믿지 않고 혼자 잘 버텨냈지만, 그리고 고통스러웠던 그날들보다는 나았지만, 그래도 행복하다기엔 너무 피곤했던 삶이었다. 성냥은꺼졌다. 하얀 연기가 사라지려하고 있었다. 그녀는 욕심이 났다. 위안소에서 봤던 그 모습, 그 후 꿈에도 다시 나오지 않았던 가족들을 다시 보고 싶었다. 성냥을 하나 더 그었다. 다시 환하게 불꽃이 일었다. 그 불꽃 속에 할머니가, 엄마가, 아빠가, 언니들과 동생이 있었다. 희남이 고향을 떠나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그리고 희남 역시 소녀가 되어있었다.
소녀가 외쳤다.
“저를 데려가 주세요! 성냥이 꺼지면 사라지리란 걸 알아요. 제발. 이곳에서 나를 데려가 주세요"
소녀는 가족과 함께 있고 싶었기에 재빨리 가지고 있던 성냥 모두 밝혔다. 성냥이 무척이나 환하게 빛나서 낮보다 더 밝아졌다. 가족들이 희남에게 다가왔다. 할머니는 우리 불덩이라고 부르며 소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희남은 아주, 아주 높이. 저 위 추위도 배고픔도, 두려움도 없는 곳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새해 첫날에도 일을 하던 미화원 김 씨는 죽어있는 할머니 시체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 시체 주위에는 성냥개비 재가 수북이 쌓여있었고 손에도 성냥개비가 쥐어져 있었다. 아마 추웠는지 성냥불로 몸을 녹이려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 할머니의 입에는 아주 행복한 미소가 걸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