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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먼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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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촉촉 Nov 29. 2021

잊어, 아니 잃어버리지 마

먼-데이 에세이 39. 분실물

어제 남부터미널역에 다시 갔다. 지하철 3호선인 그곳은 나에겐 가기 참 애~매한 곳이다. 집과 거리상으로는 가깝지만 몇 번 환승해야만 갈 수 있는 곳. 다만 지난주 토요일에는 마침 그쪽에 볼일이 있었고, 오랜만에 만나는 고등학교 친구의 집과도 가까웠기에 약속 장소로 잡았었다.

그러나 다시 가게 될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바로 보조배터리 때문에.

 사건의 전말은 간단하다. 친구와 삼겹살을 맛있게 먹은 후 거추장스러운 보조배터리 연결선을 빼고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술을 마시긴 했지만 맥주 한잔 정도라 취하지도 않았는데 정말 새까맣게 잊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생각이 나서 바로 식당에 보관을 부탁드렸다.

사실 가기 귀찮아서 조금 고민을 했다. 왕복 차비와 나의 소진될 기력이 보조배터리의 가격보다 비싸지 않을까? 그러나 한편으론 내가 자주 잃어버리는 것을 알기에 일종의 나의 업보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렇게 고생해봐야 다시는 안 두고 오지...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러기엔 나는 이미 전적이 화려하다.


 큰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는 수많은 자잘한 징후와 중간 규모의 사고들이 발생한다는 하인리히의 법칙(또는 1: 29: 300의 법칙)처럼 나의 매일 아침 풍경은 분실물을 만들어낼 거라는 조짐을 암시한다. 허겁지겁 나오는 출근길, 그 1분이 아까운 순간에 나는 아~ 맞다를 외치며 신었던 신발을 내팽개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핸드폰, 차키, 기타 꼭 챙겨야지 했던 사소한 물품들을 챙기러. 차라리 현관에서 생각났다면 다행이지만 열에 한 번은 회사에 도착하고 나서야 기억이 난다. 또 퇴근 후 집에 돌아왔을 때도 주머니 속을 확인 안 하고 그냥 걸어놓는다. 그중 일부(대개는 주머니에 들어가는 머리끈, 립스틱, 이어폰, usb 등)는 꽤 오래 그 안에 남아있다가 한 계절이 지나서야 옷장 안에 넣어놨던 가방, 옷들 사이에서 발견된다.

 이렇게 집에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자주 잃어버리고 또 찾기도 힘든 건 바로 대중교통 안에서의 분실이다. 내가 버스에다 두고 내린 우산들로 하나의 우산 더미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또 자주 놓고 내리는 건 이어폰이다.  블루투스 이어폰 이전에 줄 달린 이어폰일 때도 심심치 않게 잃어버리곤 했었다. 블루투스 이어폰이 막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차마 쓰기 꺼려졌던 이유는 내가 또 잊어먹을 것 같아서였다.

 또 뭔가 메인 가방을 들고 보조 가방이나 쇼핑백을 들고 타면 꼭 그 보조가방을 갖고 내리는 것을 까먹어서 내리고 난 뒤 지하철 분실물 센터나 버스회사에 전화한 적도 여러 번이다. 그러나 찾은 경우가 많진 않다.

음식점에서 헤벌레 하게 내 소지품을 꺼내놓고 잃어버리는 경우도 자주 있는데, 예전 핸드폰이 결제 기능을 가지기 전에는 핸드폰도 소소하게 자주 잃어버렸다. 친구 핸드폰을 빌려 전화하거나 핸드폰을 주우신 분이 집이나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찾는 일이 잦았다. 지금은 핸드폰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하니 손에서 떼는 경우가 아예 없지만, 그래도 나는 나를 알기에 잃어버릴까 봐 목걸이형 케이스를 사서 걸고 다닌다. 드라마 하이에나 정금자 변호사는 패션으로 그렇게 했지만, 나는 나를 못 믿어서 목에다 걸고 다닌다. 일단 거추장스러워야 없어졌다는 것도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이어폰, 핸드폰 충전기, 필통, 목도리, 심지어 운동화까지 참 다양하게 잃어버려봤다. 하지만 남을 탓하기엔 어려운 것은 이게 정말 내가 잘 챙겼다면 일어나지 않을 분실물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딱 한번 남이 일부러 가져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대학교 1학년 신입생 때였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가까운 곳으로 통학하다가, 순수 지하철 시간만 50분, 도합 편도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곳으로 대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정말 통학 자체가 나한테는 너무 피곤한 일이었다. 게다가 예쁘게 입어야 된다는 압박이 있어서 신발도 불편한 구두를 자주 신었던 것 같다. 하교 땐 정말 파란 바다에 젖은 흰나비처럼 축 쳐져 가기 일수였다. 그런데 문제의 그날, 내 눈앞에 지하철 자리가 낫고, 나는 무거운 숄더백을 지하철 선반 위에 올리고,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얼마 정도 잤을까.. 싸한 기분에 일어났는데 다행히 내가 내릴 지하철 역은 조금 남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머리 선반 위의 가방이 없었다. 그 가방은 신입생이라고 엄마가 사준 비싼 가죽 가방이었고, 그 안엔 새로 산 새 전공책들(중고도 아니고)과 몇 번 바르지도 못한 화장품이 잔뜩 들어있는 파우치가 있었다.  나는 창피함보다 그 가방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혹시 제 머리 위의 가방 못 보셨나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질문을 했는데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질문을 하러 두리번거리던 사이에 어떤 분이 자리에 앉아버렸다. 나는 지하철 문에 기대 눈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서울의 무서움을 실감했다. 다행히 옷 주머니 안에 핸드폰과 지갑이 있었지만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가 내 것을 훔쳤다는 느낌을 받고 무서워졌다. 그 이후 나는 지하철 선반에는 물건을 잘 두지 않는다. 너무 무거워 잠깐 내려놓고 싶을 때에도 차라리 바닥에 내 발 밑에 내려놓는다. 더러워진 바닥이 없어지는 것보단 나으니까.


그러나 이런 조심성은 지하철에서만 발휘한다. 연차를 쓰고 카페에 온 오늘도 가방을 휙 자리에다 던져놓고 커피를 시키러 왔다. 사실 내가 잃어버린 수많은 물건들만큼 부주의했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다시 찾은 기억,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가 내 것을 대신 지켜준 경험이 나에겐 더 크기 때문이다. 내 기억 속의 대부분의 공간은 K-양심의 좋은 기억으로 가득 차 있어서 아마 내 부주의는 계속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잃어버리지 마~

https://www.youtube.com/watch?v=YELYisyfeu8


출처 : https://namu.wiki/w/%EA%B7%B8%EB%9F%B0%EB%8D%B0%20%EA%B7%B8%EA%B2%83%EC%9D%B4%20%EC%8B%A4%EC%A0%9C%EB%A1%9C%20%EC%9D%BC%EC%96%B4%EB%82%AC%EC%8A%B5%EB%8B%88%EB%8B%A4


먼- 데이 에세이란?

'먼'데이마다 애'먼' 사람들에게 글을 뿌리는, '먼'가 할 말 많은 사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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