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거의 모든 활동에제약이 있다. 위드 코로나가 되었지만 아직 확진자는 2 천명대를 계속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조금씩 일상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 발생 이후 한 번도 가지 않은 곳이 있다. 목욕탕이다.
코로나 전에는 때때로 한 번씩은 가는 곳이었기에 지금은 그 아쉬움을 집에서 족욕으로 풀지만, 모자라다. 그 뜨끈한 행복을 다시 찾고 싶다. 나와 목욕탕과의 기억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된다.
1단계 : 누구나 그렇듯 엄마 따라서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어린 시절 부터, 엄마 따라 적어도 1달에 한번 목욕탕을 다녔다. 동네에 있는 황제탕에 주로 다녔다. 하얗고 큰 타일이 다닥 다닥 붙어있는 단독 건물에 빨갛고 강렬하게 황제탕 ♨ 이라고 붙어 있었다. 아무리 추운 날에도 그 안에는 훅한 온기가 가득했고, 아줌마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항상 탕 안을 울렸다. 검은색 망사 속옷을 입고, 머리를 틀어 올린 강인해보이는 세신사 아줌마도 있었다. 그러나 한번 가면 몇 시간씩 있는 그 정례 행사가 나에게는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어떤 애들은 냉탕 가서 수영장처럼 논다지만, 빼짝 마른 어린 시절의 나에게 그 목욕탕안의 열기와 수증기는 꽤나 버거웠다. 그래서 엄마는 때를 불리라고 억지로 온탕에 앉아있으라고 했지만, "언제까지 앉아있어야 해? 10분만 더? 5분만 더?" 하며 계속 나가자고 보채곤 했다. 하지만 그런 보챔에도 엄마는 수행하는 이처럼 앉아있었고 덕분에 나는 꽤나 몸부림을 치며 버텨야 했다. 그리고 쪼골 쪼골해진 손을 보며 "엄마때문에 나 벌써 이렇게 늙었어."라고 엄살을 부리기도 했다.
그렇게 버틴 후에는 엄마가 내 등짝을 치며 초록 이태리타월로 때를 밀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엔 나 혼자 보이는 곳을 밀어보려 했지만, 온기에 힘이 빠진 아이의 타월에는 묵은 각질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 다 밀었어하고 엄마한테 검사를 맡으러 가면, 엄마의 타월이 한 번 쑤욱 지나가기만 해도 검은색 때들이 후드득 밀려 나왔다. 그렇게 다시 잡혀 한참 때를 민 후, 딸 밀어주느라 목욕을 못한 엄마는 나가자 보채는 딸에게 뭔가 먹을 걸 물렸다. 그럼 난 사물함 키를 목욕탕 아주머니에게 맡기고 초콜릿 우유나 미에로 화이바를 사 먹고 얌전히 엄마 옆에서 기다렸다. 결국 그렇게 힘겨운 2시간 정도의 과정이 끝나고 나면 샤워대에서 온몸을 전체 씻고, 샴푸와 린스로 머리를 헹궈냈다. 그리고 목욕탕 밖에 나오면 참 개운하고 기분좋았다. 그래도 때를 미는 건 아프단 생각에 목욕탕 갈때마다 가기 싫다고 엄마에게 찡찡거렸던 생각이 난다.
2단계 목욕 암흑기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어 나 혼자 목욕탕을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가야 하는 곳인 줄 알기도 했고, 또 동네 목욕탕에 들렸다가 비디오 대여점에서 비디오나 만화책을 빌려서 집에 들어오는 것도 쏠쏠했기에 꽤 잘 다녔다. 하지만 좀 더 자라자 목욕탕에 가기가 싫어졌다. 예전처럼 때를 아프게 미는 엄마는 없어졌지만, 목욕탕이 싫었다. 엄마한테는 눈이 잘 안 보여서 안경을 벗고 있어야만 하는 목욕탕이 굉장히 답답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누군가에게 몸을 보인다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리고 TV에 나오는 찜질방은 핫해 보이지만 내가 가는 황제탕은 왠지 아줌마들과 아이들의 전유물 같았다. 나는 이제 그런 곳에 가기엔 다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렇게 목욕탕 가는 횟수가 줄게 되었다.
목욕 암흑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기숙사 고등학교에 진학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입학 전 겨울 방학 동안 같은 재단의 대학교에서 5주간의 예비 캠프(?!)를 진행했었다. 그런데 그 대학의 기숙사는 지어진 지 오래된 데다 방학이라 대학생들이 없어서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기숙사 급식은 기름 쩐내가 났고, 방은 춥고 건조했다. 최악은 공용 샤워장이었는데 온수는 나왔지만 샤워실이 너무 추웠다. 한 번 샤워를 하려면 꽤나 큰 결심을 해야만 했고 샤워시간을 줄이려고 최대한 대충 물만 묻히는 정도로 씻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의 종아리는 점점 하얗게 텄고, 쫙쫙 갈라진 피부에서는 피까지 났다.
몇 주만에 만난 엄마는 나의 몸을 보고 깜짝 놀랐고, 얼른 그 동네 목욕탕에 데려갔다.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느라 얻은 긴장과 맘 놓고 씻지 못하는 어려움 속에 있다가 수증기 가득한 아늑한 곳에서 뜨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꽤나 기분이 좋아졌다. "아 목욕은 이래서 하는 거구나"
그 이후 기숙사에 살면서 목욕탕을 자주 가지 못했지만 목욕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목욕은 그래도 가끔은 좀 공들여서 할만한 가치가 있는 여가였다. 게다가 성인이 되어 라섹수술로 시력을 되찾으면서 눈이 안 보여 답답하다는 생각도 없어졌다. 성인이 되서도 꾸준히 목욕탕을 찾았다.
그런데 코로나 이후로는 무서워서 못 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 같은 물이 계속 고여있는 목욕탕은 한 번 확진자가 다녀간다면 꽤나 위험이 큰 시설이었다. 그래서 코로나 확산세가 심각해질 때 오히려 굳이 목욕탕을 가야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목욕탕의 영업정지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정부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목욕탕 안가면 집에서 샤워하면 되지.'
그런데 어느 기사에 보니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집에 온수가 나오지 않는 저소득층, 취약계층이 있다고 한다. 그분들은 목욕탕이 없다면 위생 자체가 위협받는다 한다. 내가 샤워를 하라고 생각한 게 마치 마리 앙뚜아네뜨의 빵이 없으면 디저트 먹어라 같은 이야기 같아서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지난 주말 다른 동네에서 길을 걷다가 우연히 고개를 돌렸는데 이런 문구를 보았다.
사람들 더러운 것 씻겨주고, 긴장도 풀어주고, 사람들 소리로 시끌벅적하던 목욕탕이 그 놈의 병때문에 제 역할을 못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래도 마을의 터줏대감이었던 그 '마을탕'은 끝까지 댁내 평안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