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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암댁 Dec 27. 2015

인도네시아 두번째 이야기 : 하루가 멍할 때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가던 날들

  "Jangan melamun, bu" 지루한 일들의 연속일때 혹은 막연히 무엇인가 끝나길 기다릴 때 지금도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말이 있습니다. melamun! 영어로는 'day dream', 한국말로는 '멍때리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Jangan은 '하지마!' 정도?)


  새벽 6시. 씩씩거리며 숲에 들어갑니다. 한두시간 정도 지나면 몸도 마음도 노곤노곤 해옵니다. 자세히 보면 동물들도 가끔 주변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숨 잘 태세를 취하기도 합니다. 물론 제가 이해하기엔 저 너머의  일이지만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나무에 평화롭게 앉아 과일을 따 먹는 중간 중간 문득 시선이 한곳에 머물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한 모습을 보입니다.

@Eunha Ko 2010

  제 키로는 닿지 않는 시선의 끝이지만 괜시리 함께 같은 곳을 바라봐 봅니다. 검은 눈동자로 깊고 깊게 나를 바라봐준다면 제 많은 생각(pikiran banyak)을

공유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적어도 작은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Javan leopard caught on camera trap @CIFOR

  숲의 동물들이 오전일과를 정리하고 잠시 휴식을 취할 때, 가시돋힌 나뭇가지를 조심하며 바삭바삭한 나뭇잎에 털썩 앉아 돌을 베게삼아 기대봅니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면 옆에서 어김없이 들리는 소리. "Jangan melamun~(멍 때리지 말아요~),bu" 순간의 고요가 번잡하게 번집니다. Nui는 고양이같이 큰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 집중해야지...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욱씬거리던 다리를 바닥에 내려놓으니 안락함과 함께 또 다른 생각들이 스쳐지나갑니다. Aris는 생각이 많다며 구박합니다. Sari는 담배를 물고 나무 사이를 지나 저 멀리 자리잡고 앉습니다.

Sahri, Eunha, Aris, Nui @Eunha Ko 2011
 Aris의 가족들, 잠시 구눙할리문 국립공원에서 만난 인연으로 Aris의 고향인 sumatra에서 명절(Idul Fitri)을  함께 했다. @Eunha Ko 2010

  하루하루 적어가던 노트들을 바라보면서 들던 생각들이 차곡차곡 쌓여 큰 성을 이루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나이에 느꼈을 법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느리게 흘러가는 숲 안의 시간들에 대한 조급함 등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답답함이 커져갈 때는 한권,두권 늘어가는 필드노트와 노력들의 흔적을 보면서 마음을 다독여주었습니다. 새벽 6시부터 오후 5시까지 약 10-11시간의 산행으로 한시간에 네줄, 하룻동안 약 40줄, 노트 한장 반이 채워집니다. 전구 3-4개를 켜줄 물레방아 전기로 노트북을 가까스로 충전해 옮겨 적다보면 전등을 톡톡 치는 벌레소리도, 우다다다 뛰어다니는 천장의 쥐 발자국 소리도 모두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또 한번의 멍함melamun이 찾아오는 순간입니다.

필드노트, 아기원숭이 탄생 축하(selamat tahun baru), 오래 살도록(semoga panjang umur) @Eunha Ko 2011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행복했던 날들이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순간들로 가득 채워진 24시간을 최전방에서 느끼던 날들이었으니깐 말입니다. 지금은 다시 반복할 순수했던 용기도, 다시 한번 이별들을 감당할 자신감도 사라져버렸습니다. 쉽게는 한달에 한번 이메일로 안부를 전하고 짧은 문자메세지에 기뻐하던 그 생활을 반복할 수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풋풋했던 20대, 적지 않은 시간동안 열대우림 축축한 바닥에 앉아 멍 때리던melamun 경험은 온전히 이 공간에 자신을 내려놓고 원시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는 힘과 많은 생각들을 쳇바퀴 돌듯 굴려가며 곱씹어 볼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것 같습니다.

@Eunha Ko 2012

  현대인들에게 필요없을 법한 상극의 '멍함'과 예민함'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감사할 수 있는 것은 Satu(1). 어려움이 닥쳤을 때 마음을 차분히 내려놓고 본능적인 감각을 깨우거나, Dua(2). 마음속 시간을 천천히 흐르게하여 감정을 조절하거나, Tiga(3). 어떤 순간에는 숲에서 길을 찾듯 복잡함 속에서도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집중하고 확고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양분을 제공해준 열대우림의 공간속 일부였다는 점 입니다.


하품 @Eunha Ko 2010

  하품 크게 하고 월요일을 위해 굿나잇. Bu Delu의 주절주절 이야기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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