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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암댁 Dec 30. 2015

인도네시아 세 번째 이야기 : 안경(kaca mata)

사라진 안경에 대한 걱정

  며칠 전 안경을 잃어버렸습니다.  주로 저는 malas(게으른, 발음조차 늘어져서 게으른 느낌)한 안경 사용자라 일 할 때, 운전할 때를 제외하곤 안경은 코트 주머니, 가방 안에 아무렇게나 넣고 다닙니다. 샅샅이 주머니들을 뒤져보았지만 찾을 길이 없어 어두운 밤 도로를 나섰습니다.  퇴근길은 한산했지만, 혹시 어디선가 고라니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앞 차의 후미등을 주시하며 퇴근을 하니 온몸이 노곤해졌습니다. 왼쪽 0.2, 오른쪽 0.7 정도의 아주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시력 덕분에 라섹, 라식수술을 할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수술 자체가 너무 무서웠고 수술한 후에 몇 주 동안 책을 못 본다는 것도 걱정되었습니다.

한 낮의 숲 @Eunha Ko,2010

  숲(hutan)안에서의 안경(kaca mata)은 저를 더 겁쟁이로 만들어 버렸던 것 같습니다. 숲의 웅장함에 압도당함과 동시에 자꾸만 뿌옇게 되는 시야에 한걸음,걸음이 더뎠습니다. Aris는 땅을 보지 말고 앞을 봐야 한다고 계속 알려주었지만 진흙바닥과 돌 때문에 자꾸만 물 먹는 새처럼 위 한번(원숭이 확인), 아래 한번(땅 확인) 확인하며 걷게 되었습니다. 몇 주가 흐르자 이동이 늦어지는 것보다 넘어지는 게 차라리 낫다고 판단되어 걷는 속도가 빨라졌지만 여전히 안경은 저를 괴롭혔습니다. 안경은 유리(=kaca)와 눈(=mata)이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서 안경(kaca mata)이 됩니다. 사실 Aris, Nui, Sahri는 물론이고 아마도 마을 내에서 안경을 쓰던 사람이 저 뿐이라 안경이란 단어는 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던 콩(kacang)과 태양(matahari)이란 단어를 닮은 예쁜 말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그 당시 저는 안경을 매우 소중하게 다루었습니다. 안경이 없으면 숲에 들어가도 원숭이가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깨끗이 닦아 무전기 옆에 두었습니다. 혹시나 안경이 부서질까 여분으로 몇 개 더 챙겨 올  정도였으니깐요. 하지만 축축한 열대우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모기, 날파리들이 몰려와 얼굴 주변을 어른거려 손수건으로 입을 막으면 거친 숨과 함께 안경이 뿌옇게 되어버렸습니다. 빠르게 걸으며, 뛰는 와중에도 틈틈이 제 시야를 막았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안경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너무 야속했습니다.

안경 @Eunha Ko, 2014

  다시 인도네시아 구능 할리문 쌀라크(Gunung Halimun Salak)를 찾았을 때, 저는 비장의 무기를 준비했습니다. 바로 lensa kontak! 콘택트  렌즈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보는 거라 어색하기도 하고, 시간도 오래 걸려 기상시간을 30분이나 앞당겨야 했지만 숲에서의 생활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편해졌습니다. 습한 기운 때문에 눈이 건조해질 일도 없었고 더 이상 눈 앞이 뿌옇게 변해 걸음을 중단할 일도 없어졌습니다. 한국에 가면 꼭 수술을 해야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렌즈의 매력에 푹 빠졌지만 아쉽게도 여전히 저는 안경신세입니다.  이유는 역시 이전과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렌즈를 착용하는 법을 배웠기에 조금은 문명을 잘 이용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숲 가장자리 쪽 산 중턱에는 "pohon yang menangis (=울고 있는 나무)"가 있습니다. 사실 곳곳에 '찢어진 나무", '넘어진 나무' 등등이 있는데 명명된 나무의 이름은 나무의 상태가 아닌  그곳에서 벌어진 사건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찢어진 나무는 제가 그 주변을 오르다 바짓가랑이가 찢어졌기 때문이고, 넘어진 나무는 sahri가 그 나무에서 넘어져 뒹굴뒹굴 바닥까지 굴러갔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습니다. 어느 날 aris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며 '울고 있는 나무' 부근에 원숭이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울고 있는 나무?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그런 나무가 있었냐고 물으니 기억 안나냐고 오히려 되물어봅니다. '아, 이런 내가 원인을 제공했구나..' 사건인 즉, 몸이 안 좋아 1년의 공백을 두고 다시 온 적이 있었습니다. 다시 오게 되었다는 기쁨이 섞여 너무 긴장을 한 탓인지 숲에 들어가기로 한 전날 먹은 음식이 체했습니다. 새벽까지 토하고 아침도 못 먹은 채 숲에 들어왔습니다. 익숙한 길인데도 땅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듯 흔들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가까스로 원숭이 가족을 찾고 무전기를 통해 서로 모였는데, 원숭이들이 산 꼭대기 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도시에서부터 (그 좋아하던) 음식들을 가려먹으며 몸 상태를 조절 중이었는데 너무 서러운 마음이 들어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결국 혼자 하산하기로 결정하고 숲길을 내려오는데,  콘택트렌즈는 이미 빠져버렸고 눈은 퉁퉁부어 뿌연 상태에서 바라보았던 나무들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오랜만에 같이 숲에 들어간 aris, nui, sahri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는데 이렇게 웃음으로 풀어내다니, 역시나 재치 있고 재미있는 친구들입니다. 덕분에 그 날의 슬펐던 기분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Eunha(콘택트렌즈 착용), Aris,Sahri,Nui(시계방향) @Eunha Ko,2012

  숲의 길들도 조금씩 변하고,  그곳을 거쳐지나 가던 사람들도 다양해졌습니다. 우리들의 나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올는지는 모르지만 주머니에서 뒹굴다 지저분해진 안경렌즈를 무심히 닦다 보면 상황에 따라 이렇게 변해버린 제 자신 때문에 웃음이 납니다. 그토록 찾던 안경은 살짝 당황스럽게도 안경집 속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옛 버릇이 되살아 난 건지 그냥 그날은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건지 모릅니다. 이틀 뒤 찾은 안경은 열대우림 속 나무에 긁히고 비를 맞았던 안경 만큼이나 낡아버려 새 안경을 살 계획이지만, 도시생태계 안에서 열심히 버텨준 안경에게 감사를 표하고자 이 글을 씁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Terima kasi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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