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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윤 Nov 20. 2021

무딘 버릇

앞머리는 눈썹 살짝 덮을 정도로 잘라주세요.



세수할 때면 얼굴의 굴곡을 빠짐없이 지난다. 자라온 시간만큼 익숙한 곡선을 왕복하다 보면 손끝으로 이질감을 느낀다. 이마에 흩뿌려진, 잘린 낙엽같은 흉터들. 내게서 자라나진 않았지만, 작은 키와 함께 조금씩 자란 각화 된 흉터. 왼쪽 눈썹은 일부를 빼앗겨 영원히, 태초부터 없던 것처럼 비어있다. 밝은 갈색 머리와 검은 눈썹 사이를 차지한 만큼 흰 자국이 유독 눈에 띈다.      


나름대로 큰 고민거리였다. 방법을 모색하다가 결국 필사적으로 앞머리를 길었다. 당시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다만 두발규제가 있던 때라 중학생이 앞머리를 기른다는 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교문을 통과할 때면 손에 몽둥이를 쥔 매서운 레이더망을 피하기  위해 누구보다 빨리 걸었다. 나름의 요령이 생겨 언제나 또래보다 작았던 체구를 이용해, 덩치 좋은 친구들의 사각에 숨어 감시를 피했다. 때론 걸려서 강제로 잘려도 봤지만.     


날 때부터 얇은 머리를 쉴 새 없이 정리해야 했다. 봄바람이 갈라놓아 드러난 이마를 가리기 위해, 갈고리처럼 만든 손으로 열심히 머리카락을 긁어 내렸다. 눈을 가릴 만큼 자란 앞머리를 보며 어른들은 답답해 보인다며 질책했었다. 어렸던 난 거추장스러운 앞머리보다 그 말들에 더 답답해졌다. 사춘기 시절이었지만 딱히 꾸미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흉하게 자리한 꿰맨 흉터를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보다 매번 똑같은 설명을 해야 하는 일이 예민했던 시기에 참 귀찮았다.      


돌이 채 지나지 않은 아이는 보행기에 올라 있었다. 얹혀 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까. 쭈뼛거리는 얇은 머리카락과 힘을 전달받지 못하는 다리가 우뚝 솟았다. 바닥을 스치는 애처로운 까치발. 평온한 아이와 달리 집 안은 소란스러웠다. 아이의 아빠의 옛 친구가 오랜만에 놀러 오며, 데려온 두 어린이 덕분이었다.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이들에겐 문제 되지 않았다. 창창한 두 청년이 회포를 푸는 동안, 어린이들은 자유를 얻었다. 새로운 환경은 늘 어린 호기심을 자극했다. 커다란 문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아이들이 관심 가진 다용도실로 연결되는 미닫이문은 두꺼운 통유리로 되어 있다. 유리를 통해 흩어지는 햇살이 깨끗한 이마에 와닿아서, 기분이 좋아진 보행기를 탄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문은 당기거나 밀어야지. 지금까지도 익숙한 공식. 낯선 미닫이 문이 덜컹거리는 소리는 소란스러운 어른들의 말소리에 묻혔다. 고양이 같은 앙칼진 네 개의 손이 두꺼운 유리문을 힘차게 밀었다. 다시 덜컹. 집 안에 있던 누군가보다도 오래된 문짝은 치기 어린 도전에 맥없이 무너졌다. 유리창을 지나 반사되던 햇살이 보행기에 가까워졌다. 주인 모를 외침보다 빠르게 불쾌한 소리가 집안을 채웠다. 봄날이 데워놓은 방바닥 위로 체온 머금은 뜨거운 피가 흘렀다. 붉게 물든 하얀 보행기 아래에 깔린 아이가 꿈틀거렸다. 이내 크게 울었다. 스스로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우는 것 밖에 모르던 아이는 울었다. 온갖 비명소리가 유리창이 빠진 공간으로 튀어나갔다.     


기억나지도 않는, 기억이란 걸 시작하기도 이전의 이야기. 바닥을 적셨던 핏방울이 닿지 않을 것 같은, 굳은살같이 내 몸에 뿌리를 내린, 내 것이 아닌 듯한 이질의 존재. 덕분에 앞머리가 지금까지도 눈썹을 덮는다. 염색하거나 머리를 잘라도 앞머리는 늘 눈썹 너머까지. 내게 있어 불변의 법칙이다. 앞머리가 얌전한 실내에서도 항상 머리를 매만진다.      


아끼는 과거가 됐다. 더는 눈썹 위로 보이는 흉터들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무관심해서 내 흉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어쩌면 내 자기 방어가 꽤 완벽했을지도. 어느 누군가가 보고 묻더라도 이제는 귀찮지 않다. 때론 머리 밑 그늘까지 발을 들이는 당신들이 고마웠다.      


분명히 나는 이 하얀 흉터로부터 무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얇은 앞머리는 이마를 가린다.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긁어내리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내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일목요연하게 나와 함께한 것. 으레 그래 왔듯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그날의 아이들도 유념하지도 못할 하루가 내게 지우지 못한 흔적과 방정맞은 습관 하나를 남겼다. 흉터보다 오래 남을 버릇이라고, 갈라진 이마 사이를 다듬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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