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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윤 Mar 21. 2022

채무자 신고

학자금 대출




  연말이면 언제나 문자가 온다. 정기 채무자 신고, 단어만으로도 험악하게 느껴지는 연락이 온다는 것이다. 손바닥만 한 화면에 가득 눌러 담은 문자는 어딘가 소란하다. 보기 좋게 정렬된 안내 문구들 사이에, ‘꼭, 반드시’라며 자리하는 감정적인 단어들. 그것들은 마치 내가 잊는다면 큰일이 벌어질 듯 야단을 떤다. 상환을 멈추지도 않았다. 취업 후 상환이라는 이름 그대로의 방식을 성실하게 따르는 중이다. 그런데도 지독한 그 문자는, 내게 주어진 한 달 동안 바쁜 일상을 비집고 들어와 틈만 나면 재촉한다.           


  이 핑계, 저 핑계 삼아 미루다가 끝이 임박해서야 뒤늦게 신고한다. 몇 가지의 형식적인 동의와 함께 절차를 마무리한다. 그럼 그제야 뒤늦게 실감한다. 빚이 남아있다는, 채무자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정기적으로 계좌에서 빠져나가는 상환금을 봐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저 착실히 상환이 이루어지면 그만이었다. 애로사항은 없었다. 비록 빚을 지고 있었지만, 나는 나름 정직한 채무 관계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취업 후 미약하게나마 생긴 안정적인 수입 덕분에, 복학할 때 빌린 학자금과 복잡하게 계산되는 이자까지 무엇 하나 빠트리지 않았다.     


  학생 때부터 원체 돈을 쓰지 않았다. 꾸미는 것에도 크게 관심이 없었고, 가지고 싶은 것도 딱히 없었다. 컴퓨터가 오래되어 친구들과 함께 게임도 할 수 없었지만, 적당히 낡은 컴퓨터로 잘 놀았다. 집안 사정이 그리 좋지도 않았지만, 그냥 나라는 사람이 그러했다. 그랬던 만큼 대학 등록금의 액수는 꽤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살면서 그 정도의 거액을 지불하게 될 줄은 몰랐다.      


  첫 학기 등록금은 부모님께서 내주셨다. 열망하는 꿈이 없어 성적에 맞춰 합당한 대학으로 진학했었다. 그로 인해 자주 고민했다. 이 비싼 가격의 수업들이 내게 정당한 가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1호선을 거의 끝에서 끝으로 향하는 긴 통학로에서, 동기들과 떠들며 점심을 먹는 학생식당에서, 지루한 시험 문제를 푸는 와중에도 늘 그 생각에 묶인 채였다. 정신이 묶여 있어도 시간은 봐주는 일 없이 흘렀다. 내가 제자리에서 스스로 고립된 동안 2학기가 되었고 동기들은 자신들끼리 부쩍 가까워져 있었다.      


  2학기 등록금은 국가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등록금 고지서에 적힌 여러 개의 ‘0’들을 보자 더욱 실감이 났다. 동그란 쳇바퀴를 타고 고민이 내 주위를 빙빙 돌았다. 나라는 쓸모가 여러 개의 숫자로 이루어진 금액을 메꾸기에 충분치 않아 보였다. 너무나 거대해 보여서 숨쉬기가 힘들었다. ‘0’들의 형태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둘러싸고 죄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의심했다. 나의 가치를 의심했다.     


  2학기에는 변함없이 생일이 있었다. 긴 통학을 감내하며 학교생활을 버티고 있었기에, 종착지는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이었다. 언제나 해가 뜬 시간을 지하철에서 보내다가 가로등 불이 전부 켜진 뒤에야 귀가했다. 오늘이 생일이란 걸 집에 거의 다 와서야 알았지만, 나를 축하하고 싶지 않았다. 축하란 무척 거창한 단어처럼 느껴졌다. 식탁에 놓인 케이크를 보자 멀미가 났다. 굳이 가족과 함께하는 축하를 거절했다. 평소에도 말이 없어서 속 모를 자식이라 부모님은 이유를 몰라 속상해했다. 화를 내다가 이내 눈물도 보였다. 그게 또 나를 속상하게 만들었지만, 당시에 나는 플라스틱 칼에 뭉개지듯, 깔끔하게 잘린 케이크보다도 값지지 않았다.      


  아직도 생일은 달갑지 않다.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다. 또 사랑하는 사람들을 상처 줄 것만 같아 더 의식하지 않으려 한다. 굳이 누군가에게 나의 생일을 알리지도 않는다. 혹여나 질문을 받았을 때는 요령 좋게 넘어갈 만큼 머리가 커지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 글을 쓰는 팔 한 짝이 여태 숫자 타령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닐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뻔뻔하게 매년 내 앞에 다시 케이크가 놓인다. 그와 함께 용케도 잊지 않고 몇 개의 축하가 스마트폰을 울린다. 나 자신보다도 더 진심 어린 걱정들을 마주한다. 의심보다도 뜨거운, 액수를 가늠할 수 없는 마음들이 고스란히 새로운 빚이 되어 쌓인다. 여전히 나를 오늘에 앉혀놓은 다정한 애정들. 이렇게 또 당신들로부터 채무를 진다. 나를 향한 마음들을 잔뜩 빌려야 내일도 버텨낼 수 있다. 조금 더 먼 미래가 궁금할 수 있다. 나는 염치없이 당신들을 대출하고, 멋대로 아메리카노 몇 잔으로 이자를 대신한다. 영원히 다 갚지 못할 우리의 관계를 이렇게 새로이 신고한다.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벌써 몇 해가 지났다. 다시 떠올려도 불투명한 하루하루. 늦은 연말의 문자 한 통이 지금껏 버텨왔음을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는 것 같아서, 묘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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