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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윤 Mar 27. 2022

묵은 어제의 냄새

겨울 환기



  구태여 목표를 꼽자면 공허한 하루를 채울 때가 왔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겨울을 만나러, 눈에 파묻히기 위한 여행, 홋카이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언젠가 영화에서 봤던 화면 가득한 흰 눈들이 마음을 몽땅 훔쳐간 적이 있었고, 빼앗겨서 빈자리는 막연한 동경이 되었다. 지루한 일상에 지친 지금이야말로! 하는 마음으로 어영부영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냈다. 설레는 마음에 여기저기에 이야기했고, 나를 따라온 친구와 함께 무사히 신치토세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크기와 비슷하다고 하는 그 거대한 홋카이도를 시계 방향으로 무작정 한 바퀴 도는 일정이었다. ’무계획이 곧 계획‘ 이라는 내 신조 아래, 아침마다 정해지는 목적지에 따라 한 달을 움직였다.


  그리고는 공항으로부터 출발하여 섬을 절반 정도 횡단했을 무렵이었다. 작은 무인역이 있다는 말에 아침 일찍 기차에 올라 아바시리로 향했다. 12월의 홋카이도란 겨울이란 단어와 정말로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털어내지 않았다면 진작에 눈사람이 되어버릴 만큼,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눈이 잔뜩 내렸다. 기차의 창 너머로 스치는 눈을 보며 특산품이라는 에키벤을 입에 넣으니, 막연했던 꿈이 소화되고 있는 것 같아 자꾸만 설렜다.      

  아바시리는 조용한 마을이었다. 몇 명 내리지 않는 사람들 틈에 섞여 역을 나오니 주변이 전부 캄캄했다. 해가 빨리 지는 지역이라지만 늦은 시간도 아닌데, 너무나 어두웠다. 눈이 내리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방에는 이미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우리는 식사를 한 뒤 기차에서 예약한 숙소에 가려했던 당초의 계획을 수정했다. 몇 시간을 꼿꼿한 기차 의자에 앉아있었더니, 몸이 굳어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다닐 자신이 없었다. 작고 오래된 역에는 짐을 맡길만한 보관함도 없었다. 무엇보다 열려있는 식당도 보이지 않았다. 캐리어 바퀴는 눈 덮인 인도를 구르지 못했고, 우리는 어정쩡한 자세로 캐리어를 들고 눈밭을 걸었다.

  숙소는 역에서부터 도보 15분 거리. 철길을 가로질러 역의 뒤편으로 넘어가는 특이한 길이었는데, 좁은 통로를 지나면 낮은 민가들이 줄지어 있었다. 열심히 두리번거리며 확인했지만, 가뭄에 콩 나듯 보이는 가게들마저 문을 닫았다. 저곳이 최후의 보루라며 칭한 편의점 하나를 지나 도착한 숙소는 오래된 민박이었다. 다음 날 무인역에 가기 위해서는 새벽 일찍 출발해야 했기 때문에 저렴한 숙소를 골랐다. 나무로 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인상 좋은 민박집 주인들이 반겼다. 그들은 노부부였는데 몹시 친절하면서도 능숙하게 우리를 안내했다. 며칠간의 여정에서 배운 눈치로 미숙한 일본어를 이해하며 할아버지를 따라 2층의 예약된 방으로 올라갔다.       

 

  방은 민박의 외관만큼 오래된 형식이었다. 제법 운치 있는 분위기가 나름 마음에 들었다. 꽤 넓은 방이었는데, 먼저 시큼한 기름 냄새가 반겼다. 방바닥에는 다다미들이 보기 좋게 정렬돼 있었고, 구석에는 작고 뒤통수가 긴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있었다. 벽에 걸린 달력은 분명 올해의 것이었음에도 어딘가 오래되어 보였다. 할아버지는 벽장 속 이불과 복도에 있는 스테인리스 공용세면대를 설명하고는 웃는 얼굴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잠시 숨을 돌린 우리는 출발까지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지나쳤던 편의점에서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고 곧바로 돌아왔다. 허기가 가셨기 때문일까, 그제야 아까는 몰랐던 것들이 느껴졌다. 창틀은 오래된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헤진 나뭇결 사이로 외풍이 드는지 방이 엄청나게 추웠다. 다다미가 금세 차가워져서 앉아있기도 힘들었다. 급한 대로 벽장에서 두꺼운 이불을 꺼내 각자의 자리를 펼쳤다. 이불 위에 올라앉았다. 그러자 운명처럼 방 한편에 자리한 네모난 형태에 홀린 듯 시선이 갔다. 작은 공기청정기같이 생겼는데, 표면에 적힌 문구를 번역하려던 찰나. 어떻게 알았는지 조그마한 기름통을 든 할아버지가 방으로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내 앞에 놓인 녀석의 뚜껑을 열어 등유를 채웠다. 전원을 켜자 틱, 틱 소리 내며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할아버지는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해 보이며 돌아갔다. 곧 타닥- 타닥- 시동을 걸던 등유난로가 켜졌다. 몸집은 작지만 화력은 충분했다. 방을 채워나가는 붉은 색 온기가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고, 종일 찬바람을 버티던 몸이 단숨에 노곤해졌다. 세면대가 있는 복도는 쌀쌀했지만,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적당한 온도로 데워져 있었다. 어느덧 일어나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완벽했던 숙소 선택의 탁월함을 이야기하며 빠르게 잠을 청했다.      


  잠이 들고 얼마나 지났을까. 삐빅- 삐빅- 하는 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처음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며 무시했지만 멈출 기세 없는 소리에 결국 이불을 들추고 일어났다. 정체는 등유난로였다. 빨간 경고등이 점등되어 있었다. 그 아래 한자로 적힌 환기라는 글자.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한 건 몰랐지만, 규칙적으로 울리는 경고음이란 건 꽤나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한참 늦은 시간이었을뿐더러, 서툰 외국어로 상황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경고음을 타개할 대책을 고민하는 동안 난로는 점점 힘을 잃어 방 안의 온도가 내려가고 있었다.

  별수 없이 창문을 열기로 했다. 미처 다 열리기도 전에 생기는 틈새로 차가운 밤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한창 따뜻했던 방 안의 온기는 순식간에 증발해버렸지만, 다행히 난로의 경고음이 멈췄다. 낮부터 겨울바람과 부딪혀 왔기에 창문으로 드나드는 밤바람이 썩 반갑지 않았다. 창문을 전부 닫고, 아늑함을 느끼고 싶었지만 그러면 녀석의 경고음이 울릴 것이란 건 훤한 미래였다. 결국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타협한 채 창을 열고 우리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도저히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창문을 전부 열자, 녀석은 장난감을 손에 넣은 어린아이처럼 내지르던 소음을 멈췄다. 시치미를 뚝 떼는 모습에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몇 센치 되지 않는 틈새가 불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창문을 닫고 조금 지나자 또 경고음이 울렸다. 시계를 보니 지금 바로 잠든다 해도 세 시간도 채 잘 수 없었다. 더는 녀석으로 인해 낭비할 시간도 아까웠다. 우리는 선택했다. 몇 시간만 버티자. 창문을 모두 닫고 난로를 끄자. 머리끝까지 이불에 파묻은 두 마리 달팽이. 인생에서 가장 추웠던 잊지 못할 밤을 보내고 무인역에 도착했을 때, 우리의 입술은 무인역의 하늘 색깔을 닮아 있었다.     


  이사 온 방에서 맞는 첫겨울이다. 알람이 몇 번이나 울리고 나서야 돌돌 말린 이불에서 나온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아홉 개의 유리창을 지나 햇살이 드는 방. 암막 커튼을 걷으면 바깥과 맞닿은 창문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나의 반쯤 감긴 눈을 마주치자 미끄러져 내린다. 며칠 전에 붙였던 창틀의 물 흡수 테이프가 새벽 사이 흥건하다. 창 구석에 붙어 있는 설명서에는 '겨울철 실내외 온도차 및 높은 실내 습도로 인해 결로가 발생 되기 쉬우므로 환기를 통해 적정 습도를 유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힘주어 표기되어 있다. 창문을 열고 겨울바람으로 아침 세수를 하는 일은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었다.

  간밤에 켜둔 보일러에 발바닥이 뜨겁다. 환기되지 않은 어제들이 정수리에 눅진하게 서려 있다. 곰팡이는 골치 아픈 관계로 환기는 선택이 아닌 필수사항. 소리는 없지만, 차가운 아침 바람에서 경고음을 느낀다. 아무쪼록 오늘은 오래도록 창문을 열어둬야겠다. 삐- 삐- 울던 녀석이 떠오르는 아침, 겨울이 코끝에 맺혀 조금 훌쩍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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