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불면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덤윤 Mar 19. 2023

탄 필름부터

만남 첫 장



  숨소리가 들릴 것 같은 적막.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어색한 공기를 아낀다. 되돌아올 대답을 상상하면서, 말 하나를 혓바닥 위에서 몇 번이나 굴리다가 조심스레 내려놓는 사이. 앉을 자리를 몰라 빙글빙글 돌다가 우연히 겹친 시선이 멋쩍은 웃음으로 번질 때. 괜히 꼼지락거리는 쑥스러운 손가락 마디에서 하얀 여백을 직감한다. 낯선 얼굴 앞에서 언젠가에 닿을 인연을 예감한다. 


  무심코 넘겨본 표지 뒤에서 만난, 하얗게 반쯤 지워진 쨍한 초록의 바다. 시작은 오랜만에 방문한 작은 책방의 사진집의 첫 장이었다. 순간을 영원히 붙잡아놓은 사진을 좋아하지만, 재주가 없어서 보는 것에만 그쳤었다. 그런 부족한 지식의 나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던 필름 사진집. 장면을 붙잡아둔 풍경들 아래에는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드는 제목과 함께 사용한 카메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선 자리에서 책이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겼다. 필름의 입자들로 채워진 사진들을 따라 여행하다 보니 금세 종착지에 다다랐다. 

  평소 책방에 올 때는 여러 권의 책을 샀다. 그렇지만 오늘은 한 권으로 충분했다. 하얀 표지를 그대로 들고 책방 직원에게 향했다. 가볍게 인사하던 사이였다. 받아든 책을 이리저리 둘러보고는 이건 샘플이에요, 새 책을 가져오겠다는 말에 혹시 괜찮다면 샘플 그대로 구매해도 괜찮냐고 물었다. 조금은 의아한 표정으로 올려보더니 흔쾌히 괜찮다고 하는 직원에게 감사를 표했다. 조심스럽게 봉투에 담기는 책을 내려보고 있었을 때였다.

     

  “제가 찍은 사진이에요.”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했다. 상정하지 못한 대화 앞에서는 늘 버벅거렸으니까. 다문 입술 사이로 짧게 신음했다. 얼굴이 빨갛게 익을수록 머리는 하얘졌다. 그러다 문득 반가워져,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시 책을 꺼내 들고 첫 장을 펼쳤다. 하얗게 번진 반쪽의 초록빛 바다. 사진집을 넘기며 생각했던 누군가에게라도 꼭 하고 싶었던 말.     


  “이 사진이 좋아요.”     


  의자에 앉아 A와 작은 목소리에 기울이며 도란거렸다. 종종 찾던 책방이었지만 앉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A는 차분하지만 다부진 말투로 물음에 답했다. 사진을 찍었던 날들의 이야기와 붙은 이름의 사연들. 내가 눈을 반짝이며 첫 장의 사진을 묻자, A는 작게 웃었다. 

  탄 필름. 내 마음에 쏙 든 그 사진은 필름의 첫 장이었다. 필름을 교체할 때 빛이 새버린 흔적이라고 A가 설명했다. 그 뒤로도 따스한 필름 사진 한 장을 위한 필름카메라에 대하여 수고로움을 잔뜩 들었는데, 복잡한 용어들이 쉽게 이해되진 않았다. 다만 새로운 필름의 맨 처음, 하얗게 탄 자국이 그날에 선명하게 번져있었다.     

  하얗게 질릴 때면, 첫 장임을 실감한다. 인연을 마주하는 건 새로운 필름을 갈아끼는 일 같다. 타들어 간 공백으로부터의 시작인 것이다. 우리는 이제야 시작이지만 건너온 각자의 세월을 존중한다. 사진에 담기는 경계처럼 분명하게 나뉘어 있더라도, 분명한 건 필름 한 장에 담겨 있다. 이처럼 우리는 지난 시간에 대한 호기심을 담고서 첫 장을 찍는다. 구태여 서로에게 수고를 더하는 이들을 동경에 가까운 마음으로, 다시 이토록 쉽게 사랑한다. 


  탄 자국이 마치 한쪽 눈을 감은 세상 같다. 렌즈 옆의 찡그린 왼쪽 눈을 닮았다. 나는 감긴 눈꺼풀 위로, 당신들 몰래 애정을 덧댄다. 뜬 눈으로 볼 수 없는, 탄 자국 뒤로 나의 애타는 진심을 감춘다. 하얀 여백 뒷장에 채워나갈 우리의 애틋한 사진들에 설렘을 담아서.



매거진의 이전글 묵은 어제의 냄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