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2020.
"능력주의 윤리는 승자들을 오만(hubris)으로, 패자들은 굴욕과 분노로 몰아간다." (52)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은 능력주의에 퍽 익숙합니다. 어려서부터 농담이든, 충고든, 폭언이든 관계없이 자주 들어왔던 말이 능력주의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공부해야 마누라 얼굴이 바뀐다.' '공부 열심히 안 하면 더울 때 더운 데서, 추울 때 추운 데서 일한다.' '50점 미만은 반성문 쓴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섬뜩한 이 말들은 인격이 형성되고 참 나를 찾아가는 학창 시절에 교육기관에서 격언처럼 자주 사용되었던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자란 학생은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요? 자기를 스스로 성공한 어른이라 생각한다면 자기보다 낮은 자리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을 무시하는 오만한 사람이 되었을 테고, 실패한 어른으로 생각한다면 자기를 하찮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큽니다. 즉, 누구에게도 좋은 결과가 아닙니다.
언뜻 보면 능력주의는 매우 공정해 보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자기의 보상을 보장받는 것이니 말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의 소유는 자기 능력의 최대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능력주의는 '내가' 잘났고, '내가' 열심히 일해서 성공한 것이고, 패배자는 경쟁에서 실패하고, '노오력'을 안 했기 때문에 낙오된 것이라 못 박습니다. 과거에 신분이 세습되던 시기와 비교해 보면 이 생각은 아주 이상적입니다. 선천적인 것이 아닌, 개인의 능력으로 자신의 삶이 결정되니 말입니다. 그러나 능력주의의 폐단 역시 여기서 기인합니다. 자신의 성취를 자기 노력의 당연한 결과로, 자신의 수입이 적은 것을 자기가 노력하지 않은 것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 생각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하다고 말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소수의 엘리트만이 행복한 사회입니다.
그렇기에 샌델은 능력 자체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도대체 능력에게 무슨 잘못이 있을까요? 능력은 재능과 노력의 합입니다. 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무언가에 뛰어난 사람도 있고, 처음에는 약간 부족했지만 피나는 노력을 통해 눈부신 성과를 이룬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질 수 있습니다. 과연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얻은 결과는 오롯이 자신의 것인가요?
능력주의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이게 왜 질문거리지?' 하며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습니다. 먼저 재능을 보겠습니다. 샌델은 유명한 농구선수 르브론 제임스의 예를 들며 이를 설명합니다. (200) 그가 세계적인 농구선수라는 명예와 엄청난 부를 얻은 이유는 그가 사는 세상이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에 살았다면 그의 재능을 알아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고, 사회적 부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가 가진 재능을 인정해주는 시대에 살기 때문에, 그는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또 노력에 대해 보겠습니다. 샌델은 책의 서두를 2019년 3월에 일어난 입시부정 사건을 예시로 시작합니다. 사회에 들어서게 되는 최초의 등용문인 '대학 입시'에서도 게임의 룰은 공정하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해마다 기사화되는 입시부정 사건은 개인의 노력으로는 절대로 메울 수 없는 간극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또 다른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지적 능력이 완전히 똑같은 두 학생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한 명은 집안 형편이 괜찮아서 비싼 학원을 다니고 개인과외를 많이 받았습니다. 반면에 다른 학생은 형편이 녹록지 않아서 본인이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누가 더 입시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사회생활을 해나갈지는 불 보듯 뻔한 결과입니다.
물론 과거 신분제 사회와 비교했을 때 재산과 신분이 세습되는 사회보다는 어느 정도 능력에 따라 자신의 위치가 결정되는 사회가 더 공정하다고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지나오면서 우리는 능력주의가 보여준 수많은 폐단을 겪어 왔습니다. 예컨대, 취직에 실패하고 몇 년째 고시원을 전전하며 간편 식품으로 매 끼니를 채워야 하는 이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자업자득입니다. 스스로 재능도 없고, 노력도 안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쓸모 있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지 못한다는 압박은 그들을 더욱 자괴감에 빠지게 합니다. 무한경쟁이 미덕이 된 신자유주의 체제에 사는 우리는 한 사람의 생산력이 곧 그 사람의 가치라고 여깁니다. 제대로 된 생산을 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존재라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봅시다. 세상만사 중에 나의 수고로 100% 이룬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에게 빚을 지지 않고 살아가는 게 가능키나 할까요?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빚을 누군가에게 져 왔습니다. 날 때부터 우리는 나의 능력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열 달 동안 희생과 사랑으로 몸의 한 공간을 내어준 헌신이 있었기에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지식과 경험은 이미 우리 이전에 누군가가 발견해 낸 학문적 업적이었고, 그것을 사회제도로 만들어 누구나 배울 수 있도록 마련한 교육 시설에서 배웠습니다. 제자들을 사랑하는 선생님의 따뜻한 관심으로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 되어갑니다. 이 놀라운 일을 감히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일상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이 현상을 종교적 언어로는 '은혜'라고 부릅니다. 이 모든 준비과정에서 나의 재능과 노력이 들어간 자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하되,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하늘의 뜻에 맡기고 겸손하게 기다리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나 능력주의에는 지혜와 겸손이 들어갈 만한 자그마한 구멍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모든 성과는 나의 것이라는 오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현재 인간은 최정점에 도달한 문명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50년 전, 아니 10년 전만 해도 꿈꾸지 못했을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 삶이 편리해졌냐고 물으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테지만, 그래서 우리 삶이 좋아졌냐고 물어보면 쉽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수많은 이념과 제도의 보장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지만, 여전히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에게 무언가 초월적인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 우리 삶에 꼭 필요합니다. 즉, 과학과 기술의 이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신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샌델도 비슷한 지점에서 이를 지적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결과는 운명, 우연, 혹은 신의 섭리 등에 따라 정해져 주어진 것이지,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67) 근대 이후로 신의 죽음을 선포했던 인류 문명사는 다시금 신을 요청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 관해 누군가가 인터넷에 올린 서평을 보았습니다. 샌델의 지적은 유의미하지만, 결론이 조금 아쉽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마이클 샌델이 능력주의의 해결책을 '겸손'이라는 다소 엉뚱한 내용으로 끝맺는다고 비판했습니다. 실제로 샌델은 책에서 능력주의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조목조목 비판하지만 가장 중요한 결론 부분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겸손해야 한다'면서 책을 마무리짓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서평자보다는 샌델의 말이 더 호소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회제도나 시스템보다는 개개인의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봅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문제점이 계속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가수 아이유가 TV 프로그램에 나와서 인터뷰를 한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이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가 많고 노래를 잘하는 가수 중 한 명입니다. 인터뷰에서 아이유는 본인을 '운이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최정상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숱한 시련과 노력이 있었겠지만, 본인이 열심히 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공적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그저 운이 좋았다고만 말했습니다. 스포츠 스타인 김연경과 김연아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배구선수 김연경은 팀으로 하는 경기이기 때문에 팀원들과 협력했고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고 하고,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는 자신을 믿어준 부모님과 코치진 덕분에 좋은 성과를 냈다고 말합니다. 하나의 분야에서 세계 최정상에 오르는 것은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들은 성공에 대한 공적을 주변 사람들에게 돌리고 그저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뛰어난 재능이 있었고 누구보다 피나는 노력을 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룬 모든 것들을 단지 나의 능력의 결과라 생각하는 이는 자기 바로 앞에 있는 넓은 세상을 온전히 보지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입니다. 인간은 참으로 나약한 존재입니다. 내가 누구보다 잘난 것도 없고 우월하다는 근거도 없으며,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겸손은 우리가 사회에 갚아야 할 빚이라 생각하며 살게 만듭니다.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겸손한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많아질 때 비로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름답고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능력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이러한 종교적 감수성을 견지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