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리여리 Jul 01. 2021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 우리를 둘러싼 곳에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것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소설을 썼다. 소설의 내용은 이러하다. 한 가난한 부부가 살고 있었다. 구두를 만드는 일을 하던 남편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 남자가 벌거벗은 채로 길에 쓰러져 있던 것을 발견한다. 그의 이름은 미하일이다. 미하일은 마음씨 좋은 부부를 만나 6년 동안 숙식을 제공받고 제화 기술도 전수받는다. 그는 영리하여 일도 아주 능숙했다. 부부는 일 잘하는 미하일 덕분에 큰돈을 벌게 되었다. 6년째 되던 어느 날 쌍둥이 여자 아이를 데리고 온 부인이 아이들의 가죽구두를 요청했다. 그런데 그 부인은 아이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어머니가 죽은 아이들을 지금까지 키워왔다고 했다. 이 일이 있고 미하일은 그동안의 고마움을 전하고 부부에게 작별을 고한다.


  영문을 모르는 부부가 이유를 묻자 미하일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실 그는 천사였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벌을 받아 이 땅에 내려온 것이다. 그는 쌍둥이의 여자 아이의 어머니를 데려오라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고 하나님은 그 벌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얻어오라 하였다. 그중에 하나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다. 엄마를 잃은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는 부인의 모습을 보고서 그 답을 알게 되었다. 답은 사랑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스스로 잘나서 사는 줄 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그동안 받았던, 그리고 지금도 받고 있는 사랑을 통하여 지속된다.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 사랑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며 단지 살아있음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존재한다. 즉, 사랑은 사람을 사람답게 가꾼다. 아무리 좋은 삶을 산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좋은 삶이 아니게 된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사람에게 사랑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함께 사는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그렇다면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저자는 책 제목을 정하며 톨스토이의 소설 제목을 패러디한 것으로 보인다. 작게나마 이 소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겠다. 제목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책의 제목이 묻는 답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며 시작해보자.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쓰인 이 책은 우리가 평소에 도시에 살면서 가지고 있을 법한 질문들로 독자의 이목을 끈다. 왜 어떤 거리는 걷고 싶고 어떤 거리는 걷고 싶지 않은지, 왜 현대 도시들은 아름답지 않다고 느껴지는지, 호텔과 모텔의 차이는 창문으로 결정된다든지 등의 흥미로운 명제들을 통해 도시와 건축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종교, 철학, 역사 등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서 어렵지 않게 도시 이야기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풀어내고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도시와 도시의 건축물들을 파헤치고 분석한다.


  “도시는 유기체다.” 책의 결론을 한 문장으로 말하면 이러하다. 도시가 유기체라는 말은 도시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조직체라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도시는 살아있는 생물이다. 도시는 생명체이고 생물처럼 호흡하고, 먹고, 마시고, 배설하고, 도시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인다. 심장이 뛰면서 혈액을 공급하듯이 도시의 도로체계는 시시각각 물자를 운송한다. 또 도시를 이루는 건축물들은 생물의 장기처럼 각자마다 기능이 있다. 어떤 장기는 소화를 시키고, 어떤 장기는 노폐물을 배출하고, 어떤 장기는 신체를 행복하게 만드는 호르몬을 배출한다. 유기체인 도시를 큰 범위에서 먼저 살펴보고 점점 축소시켜서 살펴보자.


  저자는 이러한 도시의 기능에 주목하며 세 도시 로마, 파리, 뉴욕의 특징을 유기체의 진화 형태로 비유한다. 먼저 도시에서 상수도 시설은 유기체의 동맥과 의미를 같이 한다. 생명체의 생명 유지를 위해서 피가 필요하듯이 도시 유지를 위해서는 물이 필요하다. 피가 몸의 구석구석 잘 전달되어야 생명 활동을 이어갈 수가 있는데 로마는 효율적으로 엄청난 양의 물을 시내에 공급하였다. 상수도 시설 다음은 하수도 시설이다. 생명체에 비유하면 정맥으로 볼 수 있다. 파리의 하수도 시설은 파리를 19세기를 대표하는 도시로 만들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뉴욕은 전화망의 구축을 통해서 척추 신경계 시스템을 설치했다. 이로써 뉴욕은 20세기 이후 세계를 선도하는 도시 중에 하나가 되었다. 글을 시작하면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 어느 정도 되리라 생각한다. 도시는 순환계와 신경계로 산다.


  도시를 이렇게 보는 관점은 참 신선하다. 이렇듯 저자는 우리가 매일 보는 건축물, 도시의 새로운 관점을 소개하며 알기 쉬운 비유로 설명한다. 저자는 해박한 배경지식으로 늘 보던 것을 새롭게 보도록 제시한다. 저자는 흥미로운 점을 또 지적한다. 왜 어떤 거리는 걷고 싶은가? 그리고 어떤 거리는 걷고 싶지 않은가? 만약 이 질문에 대답하면서 이론적인 이야기를 꺼내고 어려운 수학 기호와 공식들만 즐비하게 나열된다면 ‘그렇구나!’라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설명에서 저자의 탁월성이 증명된다. 우리가 매일 다니던 친숙한 곳의 실례를 들어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왜 강남은 걷고 싶지 않은지, 홍대와 가로수 길은 사람들이 밀집되어 걸어 다니는지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를 ‘이벤트 밀도’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우리가 한 거리를 걷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거리를 걷다 보면 거리를 따라 상점과 건물의 입구가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그곳에 들어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조금 더 걸어가면 옆 건물의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선택할 수 있다. 들어갈 것인지, 말 것인지. 이렇게 두 건물의 입구를 지나친다면 우리는 총 네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할 수 있다. 1) 두 건물 모두 들어가는 경우, 2) 첫 번째 건물은 들어가고 두 번째 건물은 들어가지 않는 경우, 3) 첫 번째 건물은 들어가지 않고 두 번째 건물은 들어가는 경우, 4) 두 건물 모두 들어가지 않는 경우. 즉, 우리는 두 개의 건물을 지나치며 네 가지 선택 중 하나를 하게 된다. 여기서 건물의 수를 ‘n’이라고 설정한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이벤트 경우의 수는 ‘2의 n제곱’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걸어 다니면서 마주치는 건물의 수가 많을수록 이벤트 밀도는 높아진다.


  홍대는 지나치면서 만나게 되는 건물과 상점의 수가 많다. 그리고 그 건물의 입구는 보행자의 보행속도에 알맞게 되어 있다. 걸어 다니면서 급격한 상점의 변화를 겪고 수많은 가짓수의 선택에 놓이게 된다. 반면에 강남 거리는 보행자보다는 차를 위한 거리이다. 건물 간 간격이 비교적 멀고 그에 따라 건물 입구도 현저히 줄어든다. 따라서 이곳을 걸어 다니는 보행자는 많은 이벤트를 경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홍대는 걷고 싶은 거리이지만, 강남은 걷고 싶지 않은 거리이다.


  하나의 건축물에는 그 건축가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창문은 어떻게 내고, 마당은 어디에 두며, 자재는 무엇을 쓰고, 주변 환경과의 조화는 어떻게 이루며, 구조는 어떻게 할 것인지 심혈을 기울여 설계한다. 건축뿐만이 아니다. 좋은 글을 쓰려 노력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거나 고민하는 모습 모두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기 위한 투쟁의 과정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모두 근거가 있다. 작가에게 글의 의도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명확하게 제시할 것이다. 왜 여기에선 이 문장이 사용되었고, 문장의 호흡은 어떻게 끊고, 문장 간의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고민하며 글을 쓴다. 작가는 단어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으며 자신만의 깊고 넓은 세계를 글을 통해 창조한다. 요리사도 마찬가지이다. 이 음식에는 소금을 몇 꼬집 넣고, 다른 음식에는 간장을 몇 스푼 넣는 이유가 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신감이며 그 결과물을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본다면 건축물마다 나타나는 차이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호텔과 모텔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저자는 ‘권력’이라는 개념을 가져온다. 전통적으로 ‘본다는 것’은 권력을 소유함을 의미한다. 인간 활동 영역에서 시각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전쟁에서 높은 고지를 점령하는 이유는 적보다 더 멀리, 많이 ‘보기’ 위함이다. 인간이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며 멀리서 지구를 보는 이유는 더 많은 정보를 얻어 자신의 권력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저자는 인간이 높은 곳에 집착하는 이유를 일종의 관음증으로 해석한다. 고층빌딩에서 내려다본 거리는 사람들의 일상을 면밀히 지켜볼 수 있다. 정작 자신은 누구에게도 노출시키지 않은 채로 말이다. 그리고 높은 곳에 안주한 인간은 자신의 권력에 취해 있다.


  다시 호텔과 모텔의 차이로 돌아오자. 호텔과 모텔의 가장 큰 차이는 창문의 크기이다. 위에서 설명한 내용을 토대로 볼 때 호텔과 모텔 중에 어느 곳의 창문이 더 클까? 호텔과 모텔을 가보지 않은 사람도 쉽게 대답할 수 있다. 답은 호텔이다. 모텔은 외부와 객실을 완전히 차단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그래서 환기 이외의 목적으로써 창문은 필요 없다. 반면에 호텔에서는 바깥 경치를 보기 원한다. 그리고 자신이 보이기를 원한다. 넓은 창을 통해 바깥을 본다는 것은 곧 권력을 소유함을 의미한다.


  처음 던졌던 질문이다.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앞에서 로마와 파리 그리고 뉴욕 이야기를 하면서 도시는 순환계와 신경계로 산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순환계와 신경계가 아닌 사랑으로 살듯, 도시도 순환계와 신경계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유기체인 도시가 생명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는 사람이다. 도시에 아무리 상하수도, 통신망이 잘 갖추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제적으로 운반하고 사용하는 사람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마찬가지로 도시에 아무리 많은 건물과 상점이 존재하여 이벤트 밀도가 높다고 하더라도 그곳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으면 쓸모가 없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바다. 호텔을 아무리 멋지고 웅장하게 지어도 그 창 뒤에 숨어서 자신의 은폐를 누리는 사람이 없으면 호텔은 문을 닫게 될 것이다. 도시는 사람으로 산다.


  한편 저자는 서울의 도시건축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우리가 보통 아름다운 도시를 떠올리자고 한다면 유럽의 오래된 도시를 그리곤 한다. 몇 백 년이 지난 고풍스러운 성, 궁전, 성당이 있는 유럽의 도시들 말이다. 혹은 산토리니와 같이 순백색의 회벽으로 만들어진 집들을 상상한다. 누구도 서울과 같이 고층 건물들이 빽빽이 모여 있는 도시를 상상하지는 않을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만큼은 다르게 보고 싶다. 오래된 유럽 도시와 달리 아파트로 둘러싸인 서울의 도시는 한편으로 통일성을 보이고 있다. 우리가 서울에 살면서 이 지옥 같은, 도시계획에 실패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서울에 아파트 한 채라도 얻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하며 일생을 서울의 아파트 빚 갚는 데에 투자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서울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서울의 야경을 보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기도 한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돌아가게 하는 요인은 사람이다. 서울이 아름다운 이유는 서울에 사는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도시는 사람으로 산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사랑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생명활동을 넘어 가치 있는 일들을 이어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도시와 도시를 이어주는 것에는 교통망, 인터넷 등이 있지만 근본적 이유는 사람에 있다. 사람이 있기에 도시가 유지되고, 사람에 의해 도시가 성장하며, 사람에 의해 도시가 생겨나기도 없어지기도 한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자신의 삶의 이유를 도시에 조금 더 둔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도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