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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리여리 Jun 07. 2022

“엠마뉘엘 레비나스, 향유에서 욕망으로”

김상록. 『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 , 83-118.

  레비나스(E. Levinas, 1906-1995)는 유대인 철학자이다. 아니 제1철학을 윤리로 둔 점으로 보아 윤리학자라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기존의 철학은 인식론, 존재론 등을 제1철학으로 보았지만, 레비나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윤리였다. 전후에 폭력의 원인을 형이상학에 근거한 서구의 정신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이렇게 참된 삶을 향한 의미를 재정립하여 우리에게 던져준다.


상처와 고통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대인의 존재에 매여있는 레비나스는 하이데거(M. Heidegger)의 영향을 받아 존재와 존재자에 관해 탐구하였다.1 유대인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보편적 철학으로 확장시킨 것이 바로 레비나스의 공헌이다. 레비나스의 ‘존재’ 이해는 하이데거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양자는 존재라는 틀에 갇힌 존재의 고통에서 출발한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지만, 레비나스는 자유가 증대되더라도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88) 즉, 하이데거는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를 뛰어넘고자 시도했다면,2 레비나스는 오히려 존재의 고통의 원인이 내가 나라는 존재로 있다는 사실(존재 차원의 제약)에 있다고 본다. 인간 존재를 바라본 하이데거에게 중요한 관심사가 ‘초월의 욕구’였다면, 레비나스에게는 ‘초탈의 욕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자신을 탈피하여 절대 타자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진다.

 

존재론적 차이와 존재론적 분리

  레비나스는 하이데거의 철학 중 ‘존재론적 차이’를 격찬한다. 하이데거는 구토, 게으름, 불안, 권태 등을 생리현상, 심리현상, 사회현상 등으로 보지 않고 존재방식으로 이해한다. 지극히 일상적인 이 요소들은 존재와 존재자의 간극을 유발한다.3 나아가 존재의 고통은 존재 물음을 야기하는 형이상학적 시련임과 동시에 인류의 역사와 긴밀한 존재 물음으로 연결된다. 하이데거는 개별자가 민족의 일원으로 존재(즉, 역사)의 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주장하지만, 레비나스는 전체주의적 성향을 띠는 존재의 자기 동일화로부터 개별자를 보호하려 한다. 하이데거는 ‘피투성’(Geworfenheit)을 띠고 존재에 내던져진 존재자는 불안을 통해 자신의 피투성을 자각한다. 이 불안은 죽음으로 해결될 수 있는데 이러한 의미를 파악하고자 신을 새롭게 던지는 시도가 ‘기투’(Entwurf)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존재자를 존재에 예속시키는 하이데거와 달리 존재자를 존재로부터 독립시킨다. 이러한 존재론적 분리는 존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한다. 자기를 초탈하는 방식은 곧 타자와 관계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타인에 대한 사랑과 무한한 책임이 이 해방의 길인 것이다.


전쟁과 평화 그리고 죽음과 사랑

  전쟁은 자신을 밀실에 가두어 확장한 결과 비극의 연출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이다. 자신의 삶이 익명적 존재에 의해 소외되고 희생되는 현상은 비단 전쟁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성을 절대화하여 절대정신 이론을 완성시킨 헤겔(G. W. F. Hegel)은 전체성 철학을 의도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K. Marx),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 등이 헤겔을 비판한 것처럼 레비나스도 이들과 유사한 노선을 따른다.

  레비나스는 존재의 안위를 걱정하는 존재자의 존재방식에서 ‘존재의 향유’(fruition essendi)를 발견한다. 존재의 향유는 익명적 존재가 개별자를 노리개 삼아 자신을 즐기는 운동을 의미한다. 전쟁과 불안정한 평화가 반복되는 역사가 존재의 향유 방식이라면 이 향유의 주체는 ‘익명적 존재’이다. 각 개체들은 자신의 향유를 위해 투쟁을 벌이지만 여기에서 승리자는 익명적 존재일 뿐이다. 존재의 향유 속에서 개별자는 아무런 것도 얻지 못한다. 이렇게 보면 홉스(T. Hobbes)가 주장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 옳은 것처럼 보인다. 홉스는 투쟁 상태를 회피하기 위해 인간의 합리성을 통해 상호 간의 계약이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전쟁과 평화의 차이가 단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향한 욕망의 문제에서 드러난다고 보았다. 타자를 향한 욕망은 갇힌 상태에서 자유롭게 되고자 하는 염원으로 드러난다. 이는 프로이트가 인간 문명의 역사를 인류의 무대 위에서 타나토스(Todestrieb, 자기를 파괴하는 죽음의 충동)와 에로스(Lebenstrieb, 성본능과 자기 보존 본능을 포함한 삶의 본능)가 벌이는 싸움이라고 본 것과 유사하다. 중요한 것은 존재 정복을 벌여왔던 존재자가 삶의 중심을 자기로부터 타자로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변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죽음과 사랑을 통한 시련의 상황을 통해 무한한 타자의 타자성을 그대로 긍정하는 체험이 선행되어야 한다. 최고의 극한 상황인 죽음을 통한 자기 존재 물음은 ‘존재론적 자기’보다 더 깊은 차원에 있던 ‘윤리적 자기’를 드러내어 타자로 향하게 한다. 곧 ‘메시아적 자기’인 것이다.4 존재의 중심이 자신이 아닌 타자에 있는 삶이다. 메시아적 삶은 자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여 무한한 타자의 얼굴을 위해 희생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존재의 향유는 타자의 욕망이 중심이 되는 세계로 탈바꿈한다. 나아가 종교-윤리의 차원에서 정치적 차원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겪는다.


모성애와 부성애

  레비나스의『전체성과 무한』5이 그의 사상을 대표하지만, 후기 철학인『존재와 다르게 혹은 본질을 넘어서』6는 이전과는 다른 구도를 제시한다. 그러나 일관되게 기존의 자기 동일성과 단절을 이루는 동시에 무한한 타자를 맞이하는 새로운 자기 동일성의 정립을 낳는 시련을 통과하는 것이 실존 혁명의 관건이다.(111) 레비나스는 계속해서 자기 존재에 대해 생사가 걸린 물음을 제기한다. 이는 라이프니츠(G. W. Leibniz), 셸링(F. W. J. Schelling), 하이데거 등의 질문인 “왜 무(無)는 없지 않고, 존재자가 존재하는가?”의 질문과 다르다. 레비나스는 존재자의 존재의 정당성을 질문하였다. 존재자를 고문하는 타인은 그 자체로 형이상학적 물음이기 때문에 이 질문은 결국 무한한 타자를 지향하는 전향으로 귀결된다. 자기로 회귀하지 않고 무한한 타자를 향해 가는 초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기존의 자기’가 익명적이고 성적인 물질성과 통하는 감성을 지녔고 남성적 로고스의 부름에 응답하여 존재를 정복, 향유하는 이성을 갖춘 자기였다면, ‘새로운 자기’는 모성적인 물질성과 부성적인 영성에 각각 감응하는 감성과 이성을 겸비한 자기이다.(112) 이렇게 감성적 측면에서 무한 타자는 존재자에게 신적인 명령을 내린다. 레비나스가 ‘얼굴’이라고 칭하는 타자는 의식적으로 자기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지만, 얼굴을 통해 신적 명령을 종용하여 자신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한다. 이 모성적 감성은 단 하나의 얼굴을 자신의 고통으로 아파하고, 자신의 책임으로 느끼는 능력을 부여한다. 아이를 품에 안은 것처럼 느껴지는 모성적 광기는 세계를 지배하는 ‘존재의 법’을 부정하여 폐기함과 동시에 진정한 법을 다시 세우라는 엄정한 요구이다. 그리고 메시아적 자아인 우리 모두에게 이런 모성적 감성이 내재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터무니없는 ‘대속적 희생’이 과연 가능한가? 레비나스는 이 무한한 책임의 부름을 ‘무의식적 사태’로 부른다. 이전까지 레비나스는‘무의식’이라는 용어를 아직 의식되지 못한 의미로 이해하였지만, 『존재와 다르게 혹은 본질을 넘어서』에서는 이를 개진하여 적극적인 의미인 생명력의 약동으로 파악한다. 의식이 의식하지 못하는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 에너지의 분출이다. 레비나스는 이 무의식적 생명력의 구조를 ‘타자를-위한-일자’라 규정한다. 정상적인 의식을 지닌 사람이 무한책임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극단적 수난의 궁지에 몰려 숨 막히는 자기 불안의 시련을 겪고 나면 자신이 알지 못했던 모성적 생명력을 발휘하는 무의식적 잠재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신경증적 감성만으로 현실적인 변혁을 이끌어 내기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모성애(사랑)와 부성애(지혜)가 함께 가야 한다. 곧, 모성적 사랑에서 제외된 다른 모든 이들(tiers, 제삼자7)을 고려하여 경중을 재고 형평을 따지라는 객관적 이성의 요구가 바로 부성애의 발로인 것이다. 이렇게 윤리에서 정치로 넘어가게 된다. 모성애의 정초와 부성애의 교정이 무한히 순환하여 돌아가는 것이 레비나스에게는 실존 혁명의 동력이었다.



1 존재론(ontology)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형이상학(혹은 제1철학)으로 시작한다. 존재론에서 다루는 존재는 그리스 이후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하이데거에 의해 재발견된다. 그는 존재를 만물의 운동, 역사의 흐름 등으로 정의한다. 그에게 존재자는 시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에 존재는 존재자의 근거가 된다. 또한 인간은 이런 존재에 대한 자기 인식을 가진 유일한 존재자이다.

2 이는 제국주의 투쟁의 시대상황과 연관이 있다. 하이데거는 1933년 5월 1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총장으로 선출된 직후 나치당에 입당하였다. 10개월 이후 총장직에 물러나지만 그의 이 이력은 평생 오명으로 남았다.

3 가령, 구토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구역질로, 존재론적 권태는 무한정 반복되는 존재의 자기 동일성 운동에 대한 지겨움과 갑갑함으로 이해된다.

4 유대교적 전통에 충실했던 레비나스는 예수를 메시아로 보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오히려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타인에 대한 사랑과 책임을 실천하는 메시아가 되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잠재적 메시아이며, 메시아가 될 것을 부름 받고 있다.(108)

5 Emmanuel Levinas, Totalité et Infini: Essai sur l'exteriorité, 1961.

6 Idem, Autrement qu'etre, ou, Au-dela de l'essence, 1974.

7 레비나스는『전체성과 무한』에서 제삼자를 타인의 눈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존재로 정의하였다. 그러나 후기작인『존재와 다르게 혹은 본질을 넘어서』에서는 타자의 이웃으로서 ‘모든 타자들’이라는 이름 없는 주체에 더 가깝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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