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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리여리 Mar 19. 2021

[서평] 어머니가 죽은 사회를 사는 우리들에게

알베르 카뮈, <이방인>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 문장은 언제, 어떻게 읽어도 가히 충격적이다. 이 문장은 독자로 하여금 ‘이방인’의 향기를 물씬 느끼게 한다. 작가는 주인공을 이방인으로 묘사하고 그가 평범하지 않음을 그려낸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체는 아주 담담하여 오히려 독자가 낯섦을 느끼는 것이 이상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기존 유럽 세계의 질서에서 어머니는 세계 그 자체였다. 서양 문화를 지탱하는 두 개의 큰 기둥이 있다면 그리스도교와 그레코-로만 문명일 터인데 유럽인에게 어머니는 이 두 가치를 포괄한다. 신화에 등장하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이 사상을 잘 대변한다. 여신은 모든 것을 품으며 모든 것의 근원이 된다. 유럽인 중 누구도 이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유럽인으로서 카뮈는 시작부터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다고 고백한다.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는 담담함에서 오히려 자신이 어머니를 죽인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한다. 누군가의 죽음은 언제나 살아남은 자로 하여금 숙연하게 만든다. 그 대상이 어머니일 때는 훨씬 더 깊은 고뇌하게 만들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니체를 떠올릴 수 있다. 신을 죽인 담대함, 그리고 스스로 초인이 되고자 하는 초월성을 떠올린다면 우리는 가히 신과 어머니를 죽여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다.


  어머니의 장례식 이후에도 그의 행동은 특이하다. 장례식에서조차 그는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며, 굳이 어머니의 시신을 보지도 않았다. 장례식을 마친 후 그는 해수욕을 즐기고 여자 친구와 사랑을 나눈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는 상당히 특이한 사람이지만, 단지 그는 주변에 무관심하고 무신경한 태도로 일관했을 뿐이다. 여자 친구가 결혼에 대해 언급할 때 그는 밍밍한 반응을 보인다. 여자 친구는 그에게 자기를 사랑하냐 묻지만, 그는 그런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 대답한다. 이어 결혼할 생각이 있는지 묻는 여자 친구에게 상관없지만 네가 원한다면 하겠다고 대답한다. 여자 친구가 ‘사랑하냐’ 물을 때 ‘아니’라 답하지만, ‘결혼하자’고 할 때 ‘그래’라고 대답하는 그는 남다르다. 다른 사람이 결혼하자고 말해도 할 거냐고 묻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한다. 아주 독창적인 인물이다. 살인사건에 휘말리게 된 계기도 주목할 만하다. 친구에게 편지를 대필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그는 도와주어야 하는 충동에 이끌린 것이 아니라 도와주지 않을 이유가 없기에 돕기로 마음을 먹었다. 해변에서 친구들과 함께 한 그는 태양이 너무 강렬해서 총을 쏜다. 그리고 그 총에 누군가가 맞고 그는 살인자가 되었다.


  여기서 뫼르소라는 이름의 뜻풀이가 시작된다. 불어로 뫼르소는 죽음과 태양의 합성어다. 태양은 온 세계를 비추는 존재이다. 하늘에 걸려 있는 태양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빛과 열을 선사한다. 그럼에도 태양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온 세계를 비추고 운영하게 하는 어떤 원리와도 같다. 당시 유럽 사회는 전체주의라는 명목으로 시작된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었고 각자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태양신 숭배하듯 하며 힘겨루기 중이었다. 귀찮음에 질린 뫼르소가 진정 쏘고 싶었던 것은 태양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태양이라는 거대 권력에 못 이겨 오발되긴 했지만 그에게 사람을 죽일만한 이유는 없었다. 자신의 솔직함을 무기로 전체주의를 겨누었지만 결국 그 눈부신 거대 권력에 의해 오발되고 결국 자신의 목을 조르게 된 것이다.


  현실에서 소외되어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주인공 뫼르소는 부조리 의식과 인간 실존의 문제를 제기한다. 실존(ex-ist)을 보편에서 탈출하는 것이라 한다면 뫼르소는 그야말로 실존주의의 선두주자였다. 세상에서 직접 알려주는 방법을 거절하면서까지 자신의 실존의 가치를 드높였다. 재판 과정에서 그는 일말의 가식과 거짓을 보이지 않는다. 감형을 받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그는 이런 일이 귀찮다고 여긴다. 자신을 돕는 변호사의 말도, 재판관도, 사제도 뫼르소를 설득하지 못한다. 세상이 뫼르소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뫼르소도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뫼르소는 결국 자신의 사건에서도 소외된다.


  20세기에 들어서며 지성인들은 관념보다는 각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실존주의를 주창하였다. 실존주의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로 유명하다. 예컨대 신발을 생각해보자. 신발의 본질은 발을 보호하거나 장식하기 위함이다. 비가 올 때는 장화를 신고, 러닝을 할 때에는 운동화를, 축구를 할 때에는 축구화를, 훈련을 할 때에는 전투화를 신는다. 그 목적에 따라 모양도 기능도 다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성별, 나이, 국적, 피부색, 키, 몸무게, 종교, 취향 등 모든 인간은 다르다. 신발과 다르게 인간은 기능이나 목적이 없다. 신발은 발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그저 태어나서 살아간다. 인간은 태어난 목적도 없고 실존할 뿐이다. 이를 피투성(被投性)이라 한다.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로서 인간은 살아간다. 사르트르는 그래서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고 말한다.


  인간에게 자유는 과분한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정답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한다.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고, 어디에서 일할지 고민한다. 하다못해 점심을 먹으면서 저녁에 무얼 먹을지 생각한다. 선택은 자유이지만 선택으로 인한 결과는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점심에 주문한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자신의 선택이니까.


  자유의 역설 위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불안하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 명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이 정해 놓은 답 위를 걸어가는 것이 훌륭한 삶이라 믿는다. 대학 진학률이 70-80%를 웃돌며 고학력자 실업자들을 매년 양산해내는 한편, 어린아이부터 청장년 모두 돈이라는 우상에 빠져 모든 이가 건물주를 꿈꾸는 세상에서 우리는 낯섦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분명히 낯선 세계에서 살아가지만 마치 이전부터 그랬던 양 아무 일 없이 살고 있다. 낯선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는 이들은 이 낯선 사회 질서에 편승하지 못하는 이들을 모두 이방인으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인지 카뮈의 작품은 매우 낯설다. 주인공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영웅도 아닐뿐더러 아주 일상적인 인물도 아니다. 뫼르소는 죽어가는 이를 안간힘을 다해 살려내려 하는 의인이 아니라 태양에 이끌리어 사람을 죽인 살인자다. 그에게서는 어떠한 영웅적인 동경심도, 일상적인 친근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의 감정은 낯섦이다. 그러나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에 느껴지는 오묘한 카타르시스는 무엇 때문일까. 결국 뫼르소의 사형 선고는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태양이라는 거대 권력을 이기지 못하고 어머니를 쏜 이방인은 소외될 운명에 처한다. 세상은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다. 더 이상 전통적인 가치와 질서로 현재를 판단하지 않는다. 전통이라는 이름의 어머니는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지만, 아니 어쩌면 어제 죽었는지도 모르지만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에 의해 이방인은 결국 소외된다.


  뫼르소는 기존의 다른 소설에서 그리는 영웅적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지 않은 그는 기존의 관습과 규범을 타파하는 새로운 인간상이다. 부조리의 결정체인 전쟁의 한 복판을 살아낸 카뮈는 이방인이라는 독특한 인간을 제시하며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진리는 무엇인지 질문한다. 소설을 끝까지 읽어나가면 뫼르소의 심리에 공감하게 된다. 심지어 만일 내가 뫼르소의 자리에 있었다면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세상 앞에 단독자로 살았던 그이지만 세상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지 못한 형벌로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오늘날 우리 앞에 주어진 눈부신 태양을 극복하여 세상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뫼르소가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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