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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y Nov 27. 2015

글을 쓰지 않는 이유

지금 내가 경험하는 사랑과 행복, 이 충만한 기쁨을 글로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지만, 실행으로 옮겨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마도 게으름 때문이겠지만, 그럴만한 능력이 내겐 없다는 자의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솜씨 좋은 글쟁이 혹은 타고난 이야기꾼 - 이를테면 도스토예프스키 - 라면 지금 이 순간의 내 감정을, 황량하게 빛나는 저 산등성이를, 서늘했던 어제저녁의 보름달을 묘사하는데 100페이지쯤은 거뜬히 할애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당최 한 문장도 써지지가 않는 것이다. 


정말이지 요즘의 나는 글이란 걸 도통 쓰지 않는다. 생활과 밥벌이에 필요한 정보와 자료를 정리하거나 노트 한 구석에 두 세줄의 메모를 끼적이는 것 말고 글을 써본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글.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 말이다. 요즘에 드는 생각인데, 글을 쓰는 원초적 동력은 이별의 경험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확실히 글을 쓰는 행위는 행복이나 만족보다는 이별과 결핍에 닿아있다. 적어도 나의 경우엔 그렇다. 


몇 년 전 꽤 긴 글을 쓴 적이 있다. 그건 아마도 내가 이별을 경험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별은 여러 대상과 여러 층위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났는데, 그중에서 내 심장의 가장 깊숙한 곳에까지 파고들었던 것은 나 자신과의 이별이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는 더는 그때까지의 내가 아니었고, 내가 이별한 그때까지의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갑작스럽게 썰물이 빠져나가 바닥이 다 드러난 바닷가에 들이닥친 쓰나미와도 같았다.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의 파도가 나를 완전히 삼켜버렸고, 허우적대다가 운 좋게도 수면 위로 떠올라 숨을 터뜨릴 수 있었다. 그런 밤이면 글을 썼다. 


한때는 그토록 한 숨 한 숨 절박했던 글쓰기가 이제는 어쩌다 겨우 한 번 씩 생각나는 잊힌 기억이 되었다. 나아가, 삶의 호흡을 방해하는 거추장스럽고 부자연스러운 것으로까지 여겨진다. 신나게 공을 차고 놀던 아이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미뤄둔 숙제처럼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나는 노는 아이처럼 행복하다. 이게 얼마나 멍청하게 들리는지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그저 행복하다. 물론 내게도 짜증 나는 일들이 더러 생긴다. 우울한 날들도 있고, 화가 치미는 순간도 있고, 종종 슬픔에 젖으며, 이런저런 걱정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요즘에도 이따금 악몽을 꾼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살고 있다는 이 단순하고도 더할 수 없는 행복에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깊은 만족과 기쁨을 느낀다. 이러한 사실을 나는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다. 이런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을까. 


언젠가 나는 모르는 남자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는데, 그는 내가 쓴 글들이 다른 여자들의 판단력을 흐려 그들로 하여금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만들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 조언 혹은 협박 때문에 글을 쓰지 않게 된 것은 아니지만, 요즘 세상에 행복한 감정을 고백하는 건 위험한 행동이자 저의를 의심받아야 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젯밤 짙은 달무리와 부서진 파도의 포말에 뒤섞여 꿈인지 현실인지 어른거리는 방파제 주변을 함께 걸었다. 어느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우리가 어떠한 이유로 함께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 없게 된다면, 그렇다면 이곳에서 우리가 겪은 일들을 글로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말이다. 그런 날이 올까. 이곳에서의 우리의 시간 그리고 당신에 대해서, 글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그런 날이. 어쩐지 나는 그런 날이 영영 오지 않는대도 괜찮을 것 같다. 


이번 주말을 보내고 크레타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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