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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혼란의 시대, 케데헌의 메시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기까지

by 채자영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뜨거운 감자처럼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아이 둘을 가진 엄마다. 아이들이 이 스토리와 노래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덕에 이 만화 영화를 최소 10번은 돌려보았다. 그런데 볼때마다 재미있다. 나조차 빠져서 매 장면 보고 있다. 특히나 내가 좋아하는 마지막 OST 장면에서는 따라부르면서 약간의 감동까지 받는다. (그 노래 가사는 이따가 분석하겠지만 너무 아름답다.) 10번 이상 돌려보지 않으면 몰랐을 이야기들이 보인다.


※이 글에는 스토리의 중요 스포일러가 드러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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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정체성 혼란의 시대이다. 이 정체성 혼란은 '이미지 시대'와 함께 등장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빠르게 변화는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책 속에서 이를 '유동하는 현대', 이를 두고 "마치 액체가 그러하듯 이 세계가 가만있지를 못해 그 형태를 오래 유지할 수 없"는 사회라고 고한다. 과거와 다르게 인터넷 속도는 더욱 빨라졌고 SNS는 일상을 침투했다. 한 사람의 모든 것이 마음만 먹는다면 거의 생중계되는 각자가 자신만의 트루먼쇼를 만들어 가고 있는 사회가 되었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인간의 속도는 기계의 속도와 다르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며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결과물을 내는데 일정 시간의 인고와 노력이 필요하다. Chat GPT처럼 질문을 하면 몇 초만에 대답해내는 그런 능력이 인간에는 없다. 인간은 하나의 질문을 오래 두고 답하며, 생의 결정적 질문은 긴 시간을 들여 각자만의 방식으로 답한다. 그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곧 인생이기도 하다.



정체성 혼란의 시대

정체성 혼란을 이야기하려면 우선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부터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정체성은 철학자 에릭 홈부르거 에릭슨이 최초로 구축한 심리학 용어로, 그 철학자는 자신의 생애를 기반으로 이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그는 덴마크계 독일인으로 유대인 엄마 아래에서 재혼한 아빠와 함께 자라났다. 유대인 사회 속에서 홀로 다른 생김새를 가지고 성장한 에릭 에릭슨은 어린 시절부터 늘 주변 사람들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며 자랐던 것 같다. 그렇게 '자아정체성'이라는 단어는 에릭 에릭슨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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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체성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를 내렸다.


타인과 구별되는 한 개인으로서
현재의 자신은 언제나 과거의 자신과 같으며
미래의 자신과도 이어진다는 생각으로,
모든 유기체는 유전적 기질을 바탕으로
사회적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성장한다.

Erikson, E. H. (1931 – 2007)

그러니까 정체성은 한 개인으로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하여 흔들리지 않고 답할 수 있는 스스로의 답을 찾는 과정이며, 이 과정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고난 것(유전적 기질)과 동시에 내가 현재 속해 있는 사회적 환경이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누구인지 묻게 되며, 이는 인간의 본질이다. 사실 우리는 그냥 태어나졌다. 눈을 떠보니 이미 세상이 눈 앞에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며 '나는 왜 태어났는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봉착한다.


에릭 에릭슨은 정체성에 관해 이야기하며 가장 중요한 사실을 강조하여 말한다. 정체성이라는 것은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통합을 목표로 하는 하나의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체성은 실제로 멈춰있는, 고정된 완성형의 상태가 아니라 생의 환경에 따라 생의 시기에 따라 주기적으로 변화하는 유동적인 하나의 움직임이라는 말이다. 나는 재미있는 단어 하나를 그의 책 속에서 발견했다.


An old and new identity.
아이덴티티란 과정(process)이면서 운동으로 그것은 낡은 자신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과 보다 새로운 자신으로의 재생을 해가는 불일치에 의해서, 또 그 불일치를 만들어 나가면서 균형을 취해가는 운동.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충동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과거의 낡은 자신과 일관되게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과 새로운 자신으로 나아가기 위한 희망의 여정이 지속적으로 불일치하여 괴롭고 동시에 그 불일치의 균형을 만들어 가는 운동이 바로 '정체성의 형성'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사회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변화를 따라가기 버거워진 환경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누구인가 질문하는 고독한 시간을 잃어버리고 늘 정체성의 혼란의 맛보고 있다. 특히나 다민족의 시대, 서로 다른 모양새와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글로벌 시대에 더더욱 '나는 누구인가'에 대하여 정확하게 대답하기가 어려워졌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감독, 메기 강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5세에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이민 세대로서 그녀 역시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자라나고 지금 현재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메세지를 전하는 콘텐츠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감추지 않는 마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는 마음.


루미는 악귀 아빠와 헌터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유일하게 헌터인 동시에 악귀인 존재이다. 늘 경계에 서 있는 그녀에게 세상은 악귀를 '감추고' 헌터로 살아가라고 강요한다. 그녀는 자신의 몸 속에서 계속해서 퍼져나가는 문양을 보며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은 아닌가 늘 불안에 떨며 살아간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뿐이다. 도망치는 것.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도록 가리고 사라지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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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혼문의 희망을 놓지 않던 루미는 진우의 계략으로 몸 속의 문양이 무대 앞에서 만 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상처받은 마음을 안고 친구들을 만났으나 그녀들 역시 루미에게 칼을 들이댄다. 그렇게 오래 함께 했음에도 진실을 감추었던 루미를 그들은 믿지 못한다. 그때부터 루미는 헌터라기 보다는 악귀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모든 문양에 잠식 당한 루미가 끝끝내 향한 곳은 자신을 어릴 적부터 키워준 셀린이다. 유일하게 자신의 모든 존재 비밀을 알고 있는 셀린. 하지만 셀린만은 자신을 품어줄 것이라 믿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사실을 은폐하고 자신이 정해 놓은 해결책에 집착한다. 이 모습이 어딘가 익숙한 기시감이 드는 것은 우연일까? 문제의 본질을 다루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을 계속해서 덮어내려는 태도. 셀린은 과거의 자신이 배웠듯 반본적으로 이 말을 주문처럼 내뱉는다.


감춰야 해. 숨겨야 해. 이 모든 걸 감추면 고칠 수 있어.



루미는 울부 짖는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봐 달라고. 왜 자신을 보지 못하냐고. 이 모습 그대로 사랑해 달라고. 이것이 나의 본질이라고. 이 처절한 장면은 정체성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하는 건네는 외침이자 메시지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자신조차 외면하고 SNS 속에 포장된 자신만을 진짜라 믿으며 허상을 좇는 사람들. 세상이 치부라 여기는 낙인을 그대로 받아들여 두려움과 유별남 혹은 특별함을 계속해서 감추고 지우는 사람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타인이 원하는 모습으로 그저 보통의 인간이 되어가는 사람들. 하지만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는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라고 세상에 외친다. 이 장면은 주인공 루미가 최초로 사회적으로 전해오던 관습을 부정하고 자신의 의견과 마음을 솔직하게 내비치며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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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이 된 모습의 루미는 온 몸에 악귀의 문양을 그대로 드러내고 귀마에게 간다. 자신의 온 생을 걸고 최선을 다해 지켜온 혼문이 망가졌다고 비웃는 귀마의 말에 '그러든지'라는 말로 쿨하게 답한다. 그리고 그녀는 새로운 인물이 된다. 악귀이자 헌터인 새로운 인물. 이전에는 악귀임을 부정하고 감추었다면 이제는 악귀임을 인정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귀마와 마주한다. 이때 루미는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진심의 힘이다. 그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노래 「What I Sounds Like」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세상에 드러난 루미, 그녀는 이제 두려울 것이 없다. 두려움 없는 강력한 존재는 자신의 진실된 이야기를 깊고 짙은 음색으로 전한다.


Nothing but the truth now

아무 것도 없어, 여기 진실만 남아 있어

Nothing but the proof of what I am

이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증명할 수 있어

The worst of what I came from, patterns I'm ashamed of

내가 걸어온 가장 최악의 수치스러운 문양들

Things that even I don't understand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일들


I tried to fix it, I tried to fight it

고쳐보려고 했어, 싸워보려고 했어

My head was twisted, my heart divided

머리는 혼란스럽고 마음을 갈려져있었지

My lies all collided

내 거짓이 모두 뒤엉켜버렸어

I don't know why I didn't trust you to be on my side

왜 너희들을 믿지 못했을까? 내 편이 되어줄 거라고


I broke into a million pieces, and I can't go back

나는 산산히 부서져버렸고 이제 다시 돌이킬 수 없어

But now I'm seeing all the beauty in the broken glass

하지만 이제 깨진 유리조가들 속 그 안에 담긴 아름다움을 보고 있어

The scars are part of me, darkness and harmony

상처는 나의 일부, 어둠 그리고 조화

My voice without the lies, this is what it sounds like

거짓없는 내 목소리, 이게 진짜 나야, 내 목소리야.


「What I Sounds Like」중



이 노래의 가사를 가만히 곱씹어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이다. 루미는 "I broke into a million pieces, and I can't go back"라고 말한다. 산산히 부서져버린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루미는 악귀라는 최악의 자신을 스스로 인정하고 이미 이렇게 부셔져 버린 자신이 과거의 자신으로, 그저 헌터였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이어서 "But now I'm seeing all the beauty in the broken glass"라고 말한다. 산산히 부서져 버린 유리 조각들, 가만히 들여다 보니 그 부서진 조각들이 하나하나 빛나고 있다. 자신만의 빛을 내며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 아름다움을 이전에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인물이 되었다. 자신의 존재를 그대로 이해하고 인정한다.



과거와 미래의 충돌,

그 사이 부유하는 우리.


앞서 밝혔듯 우리는 그 어떤 시대보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는 다른 말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충돌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과거의 지혜와 정답이라 여겼던 것들 오래도록 전해 내려오는 문화가 미래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해석하고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그런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예측할 수 없는 미래 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바라보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빠르게 답해야 할 것만 같은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내 안의 진짜 이야기와 내 안의 진짜 아름다움을 바라보지 못한 채, 타인의 강요에 의해 '결정한' 정체성은 가짜이다. 정체성은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며 그 인식을 기반으로 지금 나의 행동과 선택이 결정된다. 하지만 우리에겐 진득한 시간과 고독이 박탈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가르고, 진짜 문제와 일시적인 소동 혹은 경보 따위를 가르는 일을 해야 하는데 도저히 한 곳에 머무를 수가 없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단순히 선과 악의 구도로 선이 악을 물리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 굉장히 복잡한 구도를 가지고 있으며 절대 선과 절대 악의 경계를 없애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상처입고 망가져도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보며 질문을 품게 된다. 나는 나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있는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있는가? 나 스스로를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있는가?


그리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말한다. 그래도 괜찮다고. 충분히 괜찮다고.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두려움, 실패, 어리석음, 부족함이라는 수치심을 인정해야 진짜 자신이 될 수 있다고, 더욱 강력한 자신이 될 수 있다고. 그러니 용기를 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라고 이야기 한다.







글 | 2025년 9월 21일

발행인 | 채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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