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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유 Oct 24. 2016

당신은 누구십니까? (5)

그 사람은 잿빛 비니를 쓰고 나타났다.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서글서글 쳐진 눈매가 보였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수줍은 듯 강연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사진으로 익히 봐왔기 때문에 나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백팩을 메고 가벼운 차림으로 무대 위로 올라선 그는 마련된 자리에 앉아 객석을 바라봤다. 첫 줄에 앉은 사람과는 1미터도 채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다. 미간의 작은 움직임도 모두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그는 부끄러운 듯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아 있었던 나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생각보다 체구가 조금 작았다. 내가 상상했던 날카로운 눈빛이나 기자 같은 풍채, 혹은 무언가를 압도하는 기운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너무 부드럽고, 너무 말랑말랑해서 녹아버릴 지경이었다. 마시멜로 같다고 하면 어울릴까. 눈빛은 날카롭다기보다는 선명한 쪽에 가까웠다. 말투는 거칠다기보다는 조심스럽고 신중한 편이었다. 목소리는 생긴 그대로였다. 그렇게 그는 사회자의 질문에 하나씩 하나씩 답하며 나에게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혼자 소설을 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과연 소설가가 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던 그런 시절이 있었죠. 그때 이런 장면을 상상해봤습니다. 책을 출판하고, 독자들과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바로 이런 장면을. 지금 굉장히 송구하고 기쁩니다. 마치 뽕을 맞은 것처럼."


혼자 소설을 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나는 그 첫마디에 그만 눈물이 핑 돌아 어금니를 꽉 깨물어야 했다. 이 사람의 그 무엇이 나를 이렇게 감정적으로 만들어버리는지 신기할 노릇이었다. 고작, 그가 한 첫마디는 '혼자 소설을 쓰던 시절'이라는 말이었는데 그 말에 나는 왜 그리 울컥하던지. 내가 선망해마지않는 저런 큰 작가에게도 혼자 소설을 쓰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공평한가!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생각에 희망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혼자 소설을 쓰던 시절'이라는 말이 간단해 보이지만 결코 간단한 말이 아니다. 특히 장강명 작가처럼 다른 일을 하다가 뒤늦게 데뷔한 작가의 경우 더더욱. 얼마나 고군분투했을까. 그 피곤함을 이겨내고 뭐라도 쓰겠다고 불을 밝히고 앉았었을 밤들. 써도 써도 내가 쓴 글 같지 않은 자괴감에 내 글을 쓰리라 이를 갈며 목말라하던 순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이 써지지 않는 문장들. 빈 화면 앞에 앉아 수 없이 맞닥뜨렸을 자괴감과 무력감들. 아, 나는 '혼자 소설을 쓰던 시절'이라는 그 한 마디에서 그런 것들을 느꼈다. 내가 지금 이 순간에도 느끼고 있는 그 고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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