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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유 Sep 24. 2024

세상의 모든 시작이 내 손안에 있었다

재봉틀로 만들어가는  작고 행복한 이야기

언젠가 한 번쯤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그렇게

언젠가 한 번쯤은 해 보고 싶은 일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지리산을 종주한다거나, 서핑을 한다거나 하는.

그런 열망들은 조그맣게 피고 지기를 반복했고 나는 그렇게 지는 꽃잎들을 바라보며 지나가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때로, 그런 씨앗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움이 터서,

생각지 못한 때에 내게 다가와 준다.


미싱이 그랬다. 재봉틀이라는 우리말이 있지만, 어쩐지 미싱이라는 말이 입에 찰싹 달라붙는,

미싱.


어린 시절, 거실 한편에 앉아 미싱을 돌리던 젊은 날의 엄마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 시절, 엄마는 왜 그리 미싱을 돌렸을까, 생각해 보면,

이제는 나도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내 손으로 두 자매의 원피스를 만들어 입히는 기쁨.

예쁜 천을 떼다가 커튼을 만들어 거실 창문에 다는 기쁨.

주름을 잡아 만든 레이스가 달린 식탁보를 만들어 상을 차리는 기쁨.

피아노를 사면 피아노 덮개를,

소파를 사면 예쁜 방석과 쿠션을 만들며

엄마는 기뻤을 것이다.


생산의 기쁨, 창작의 기쁨, 노동의 기쁨.

내 손으로 원하는 그 무언가를 만든다는 기쁨.


윗실과 밑실이 단단히 맞물리며 박음질이 될 때의 기쁨!


나는 그 시절 엄마의 나이 즈음이 되어 미싱을 처음 만났다.


첫 아이를 낳고 매일매일 반복되는 하루에 무료해질 때쯤, 오랜 친구 미현의 집에 가서 처음으로 미싱을 만났다. 미현은 해외에서 직구로 산 싱거 미싱 앞에 앉아 드르륵드르륵 하더니 금세 눈앞에 예쁜 담요 한 장을 만들어 냈다.

보통 재봉 작업은 뒤집어서 하기에, 처음엔 완성된 모양새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박음질을 마친 후 조그만 창구멍 사이로 천을 뒤집었을 때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은 마법과도 같았다.

마치 마술쇼를 보는 듯한 느낌.


원하는 천으로 원하는 모양을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는 자유.

그리고 창작의 기쁨과 생산의 기쁨.

그런 것들이 미싱 안에 있었다.


조그만 원단 안에 고래와 바다가, 나뭇잎과 산이, 꽃과 들판이 모두 들어있고,

내 손안에 그 세계가 질서를 잡아가는 기쁨이 있었다.

고래와 바다가 가득한 나의 첫 작품들


세상의 모든 시작이 내 손안에 있었다


나는 미현의 도움으로 아마존에서 싱거 미싱 한 대를 샀다. 그리고 미현에게 배운 대로 미싱을 돌렸다.

처음에 할 수 있는 것은 직선박기뿐이었다.

나는 아무 천이나 가져다 직선박기를 했다.

드르륵드르륵.

윗실과 밑실이 단단하게 맞물리며 박음질되는 모양을 보며 무아지경에 빠졌다.

조그만 바늘  끝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단단하고 완벽했고 무엇보다 자유로웠다.


아기가 잠들고 나면 나는 조그만 방으로 들어가 밤이 늦도록 미싱을 돌렸다.

백일이 갓 지난 아이를 키우느라 하루종일 집과 아이에 매여있었지만

상상 속에서 나는 이미 새처럼 자유로웠다.


단단한 박음질의 세계는 내게 행복과 안정감을 주었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은 모두 다 이루어지는 세계


나에게 미싱은,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내 손으로 이룰 수 있는 세계가 되어 주었다.

마음대로 되는 것이 얼마 없는 이 세상,

해야 할 일과 의무와 책임으로 가득 차,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은 하루 10분도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

내 두 손으로 무언가,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손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게 자유로운 느낌을 주었고

그 느낌은 내가 무력감에 시달릴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웠다.

 

밤이나 낮이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단단히 박음질하던 나의 늠름한 미싱

다시 시작하는 나의 이야기


언제나 무너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것이 나의 마음이었다.

그러는 새 나이를 많이도 먹었다.

이렇게 계속 나이를 먹어도 되는 것인지 무서울 정도로

세월은 빨리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오늘 또다시 힘을 내 본다

윗실과 밑실을 단단히 매듭지으면서

나만의 작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


조그만 바늘 끝에서 시작되는

나만의 작고 행복한 재봉 이야기.

둘째가 태어나길 기다리며 만들었던 담요와 스카프빕.


처음의 마음으로


둘째가 태어나길 기다리면서 만들었던 담요와 스카프 빕.

펭귄 캐릭터와 푸른 색감이 마음에 쏙 들었다.

보드랍고 포근한 뒷감은 당시 유행하던 담요 원단이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동대문으로 나가 예쁜 라벨지도 샀었지.

세상은 점점 거대해지고 우리의 세상은 갈수록 어려워지지만

나의 손 위에서, 조그만 바늘 끝에서 만들어지는 세상은

언제나 새롭고 아름답다.


그 처음의 경이로움을 언제나 기억하며,

오늘 하루도 감사하게, 행복하게,

그렇게 살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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