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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연아빠 Aug 31. 2023

관사 입주의 명암

인생사 호사다마 또는 새옹지마

(엄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거리가 멀어서 자동차 사서 운전하고

다니는 것도 걱정했는데 말이다.  


(나) 나도 관사는 포기했는데...

새로 온 기관장이 업무를 많이 시킨대.

이것저것 시킬게 많아서 낮은 연차순으로

입주를 시킨 게 아닌가 싶기도 해.  


(엄마) 앞으로 30년 넘게 공무원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초임 때 다양한 일을 해야 나중에 편할 거다.

식당 장사도 재료준비, 홀 서빙, 음식 조리 등 모든 걸 알아야 가능한 거야.

나쁜 일 시키는 거 아니면 기회를 얻었다 생각하고 열심히 해.

항상 하는 말이지만 타인의 배려에 고마움을 알아야 성장하는 거다.

그런 사람은 옮고 그름을 알고 정의감도 있다는 뜻이니 말이다.


(나) 그려. 무엇보다 적은 월급에 월세를 아끼게 되어서 매우 다행이야.

160만 원 받아서 40만 원 정도를 내야 하다니...

아낀 월세만큼 매달 엄마에게 보내줄게.

저축하려고 하지 말고 용돈해!


(엄마)  고맙다. 나는 남편보다

아들이 주는 돈이 제일 마음 편하다. 고마워, 아들!  



내 예상대로 신임 기관장은 우리가 해야 할 많은 일들을 만들어냈다.

약 130억 원 규모 전시관 신축 예산 확보가 대표적 사례이다.

총사업비 대상 사업이 아니다 보니 왜 건물을 지어야 하는지에 대한

본부 및 기획재정부가 납득할 수치화된 근거를 만들어 내야 했다.

퇴근 시간은 오후 6시가 아닌 매일 밤 10시였다.  

자료를 조사하다 기관장이 짓고자 하는 전시관에 대해서

본부 및 기획재정부가 부정적이라는 것을 알면서 더욱 힘들었다.


(본부) 인구 5만도 안 되는 지방에 전시관 신축을 하겠다니...

돌아가서 기관장께 올 해는 참으시라고 전해주세요.

아니면 기존 전시관 리모델링으로 방향을 정하시면 고민해 보겠다고 말이에요.  


(기재부) 주사님 본부에서도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데 저희가 해드리긴 어렵죠.

본부먼저 설득하시고 저희는 그다음에 와주세요.

먼 거리를 자주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시네요.


(기관장) 미국 라스베이거스는 사막이었지만 관광과 문화시설이 들어서며

미국의 대표적 관광 시설이 되었답니다.

우리가 짓고자 하는 전시관은 어린이 전용입니다.

마이카 시대에 어린이 전용 전시관은

분명 이 지역의 대표 문화 및 관광시설이 될 겁니다.



본부를 다시 방문해서 기관장이 말씀하신 자료를 정리해서

왜 어린이 전용 전시관이 필요한지 설명했다.

하지만 본부 담당자의 한 마디에 내가 준비한 모든 자료와 논리는 무너졌다.


(본부) 그래요... 카지노라면 두메산골이라도 사람들이 찾아가겠지.

어린이 전용 전시관에 카지노... 가능해요?


결국 신임 기관장은 정부안에서 예산편성은 어렵다 생각하고

2단계 대안을 내게 지시했다.

그건 지역구 국회의원을 만나서

국회심사 과정에서 쪽지 예산으로 설계비를 반영하는 것이다.

산 넘어 산이었다.

I believe whatever doesn`t kill you simply makes you stranger.

배트맨 다크나이트에 나오는 대사이자 당시 내 처지를 잘 표현한 문장이다.


19년 지나 되돌아보니 어머니의 말씀은 정확했다.

신임 기관장이 지시한 일들은 나쁜 일이 아니었고

업무를 하면서 그분을 존경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진지한 자세로 설명 자료를 만들고 사람들을 만났었다.

그 분과 2년간 함께 하며 결국 예산을 확보했고 나는 예산 편성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엄마) 내가 미치겠다. 정말...


(나) 왜요? 누나들이 사고 쳤어요?


(엄마) 네 아빠 말이야. 회사에서 그만두라고 했다더라.

너 회사 다니면서부터 일하기 싫어하더니만 결국 이렇게 되었어.


(나) 이제 놀겠다는 건가요? 모아둔 재산도 없는데?

이건 엄마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일단 금요일에 집에 가서 물어볼게요.

그리고 내가 생활비를 조금 더 보낼게요.

아버지의 실직으로 50만 원에서 80~100만 원으로

엄마에게 보내는 생활비를 올렸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2005년부터 내가 결혼을 한 2014년까지 말이다.

160만 원 월급에도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관사 덕분이었다.


2013년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준비하면서부터 타임머신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매 순간 했었다. 

다시 2005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하고 말이다. 

다시 돌아간다면 엄마를 모시고 확실한 분가를 했어야 했다.

가난은 항상 이유가 있고 

우리 집은 그 이유가 아버지란 것을 늦게 알아버린 것이다. 

관사 입주 덕분에 말이다. 

관사 입주는 호사이자 다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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