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지후 Aug 20. 2023

일주일에 4일만 출근합니다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 균형 잡기


주 4일만 출근하고 있어요.

이렇게 말하면 열이면 열 부럽다는 반응이 나온다. 이해한다. 나도 주 5일 직장인이었을 때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주 4일 출근한다고 해서 주 4일만 일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머지 시간은 프리랜서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반은 직장인으로 반은 프리랜서로, 말하자면 ‘반직반프’인 셈이다.


반직반프, 이름조차 생소한(당연하다, 내가 만든 말이니까) 이런 삶의 형태를 처음부터 계획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우연과 필연, 가설과 시도가 얽히고 겹쳐서 만들어진 결과였다. 요즘 나는 직장에서 회계 업무를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프리랜서로서 콘텐츠 기획과 에디터 업무를 하고 있다. 성격도 형태도 다른 두 가지 일을 하는 반직반프의 삶. 평범한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일을 하기 전까지는 몰랐지만 일 경험이 쌓이면서 나와 맞는 것, 관심 있는 영역, 하고 싶은 일에 관한 다양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그 힌트를 바탕으로 일을 선택할 때 가설을 세웠고 그 가설들을 검증하며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오늘은 그 여정을 간단히 공유하고자 한다. ‘일하는 나’를 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행복하게 일하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가설 1: 글은 못 쓰게 되었으니 취업이나 잘 되는 곳으로 가면 괜찮겠지?


인생의 첫 번째 가설은 포기에서 시작되었다. 소설을 쓰고 싶었던 나는 원하던 문예창작과에 들어가지 못했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취업이 잘 된다는 세무회계과에 들어간 것이다. 졸업하면서 주변에서 많이 들어갔던 세무사사무실에 입사했는데, 정말이지 딱 죽을 맛이었다. 답이 정해져 있는 반복 업무는 창작자의 자아가 있는 나에게 고난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첫 직장에서 2년은 버텨야 한다’는, 어디서 주워들은 말에 꾸역꾸역 2년을 버티고 퇴사했다.



가설 2: 자유로운 분위기의 외국계 회사에 가면 좀 낫겠지?


일본어를 취미로 공부해왔어서 외국계 회사를 가볼까 싶었다. 기왕 공부한 외국어도 좀 써먹고, 외국계 회사의 자유로움도 경험하고 싶었다. 그럼 같은 회계 업무라도 좀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내가 들어간 곳은 말만 외국계였지 대표를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한국인이어서 한국계 회사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비인격적인 선배들과 예민한 업무에 번아웃이 와서 2년을 버티지 못하고 돌연 일본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다.


일본에서는 잔잔한 일상을 살았다. 특별한 이벤트가 없는 고요한 매일이었다. 그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에너지가 차올랐다. 그 에너지로 일본에서 한국 책을 출간하는 출판사에 메일을 보냈다. 이를 계기로 도쿄국제도서전에서 스태프로 알바를 하게 됐는데, 그 현장에서 처음으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타국의 사람들에게 알리는 자부심과 설렘이었다. 살아있다는 생생한 감각을 느끼며 책과 관련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설 3: 좋아하는 책과 관련된 일을 하면 즐겁겠지?


좋아하는 책을 다루는 일을 하면 살아있음을 느끼며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귀국 후 편집자학교에 지원했는데 떨어졌고, 대신 출판 공공기관에 들어가게 됐다. 다행히도 책을 직접 다루는 부서에서 일하게 됐지만 결국은 행정적인 업무였다. 2년이 다 되어가자 ‘이 일을 평생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설 4: 글로 돈을 벌면 행복하겠지?


회계도 출판도 아니라면 뭘까? 갈팡질팡하는 마음속에 오래된 꿈이 떠올랐다. 나는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럼 글로 돈을 벌면 행복하지 않을까? 글로 돈 버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글로 돈을 버는 방법에는 직접적인 수단과 간접적인 수단이 있다. 직접적인 수단이란 소설가나 평론가처럼 자기 창작물로 돈을 버는 경우이고, 간접적인 수단이란 번역이나 편집처럼 누군가의 글을 가공해 돈을 버는 경우이다. 직접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기에는 가능성도 희박하고 시간도 오래 걸릴 것 같아 간접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바로, 번역이었다.


지인 소개로 번역 아카데미에서 일본어 번역을 배웠다. 번역 에이전시도 같이 하고 있는 곳이어서 졸업하면서 운 좋게 바로 데뷔도 하게 됐다. 하지만 번역에 들이는 시간과 에너지에 비해 대가는 박했다. 거기에 머지않아 인공지능에 대체될 직업으로 유망(?)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지속 가능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설 5: 가치 있는 일을 하면 지속할 수 있겠지?


그즈음 친구와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친구는 공무원 시험을 오래 준비하다가 결국 시험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는데, 그러고 나자 자신처럼 시험을 그만둔 사람들이 궁금해졌다고 했다.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청년들의 이야기, 정도가 아니라 우회도로를 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말이다.


이와 관련한 강의를 들으러 다니고 리서치하다 보니 ‘소셜섹터’라는 영역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 비즈니스를 통해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모인 영역이었다. 이렇게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소셜섹터에서라면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지속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소셜섹터에 진입하기 위해서 회계 일을 다시 하기로 했다. 회계는 상대적으로 업계를 옮기기에 용이한 편이기 때문이다. 검색하자마자 보인 웹사이트에 접속해 보니 마침 회계 담당자를 구인한다는 공지가 보였다. ‘럭키!‘를 외친 것도 잠시, 그 공고는 마감 기간이 지나있었다. 하지만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어서 지원서를 넣었는데 바로 연락이 왔다. 그렇게 소셜섹터에 입문하게 되었다.



가설 6: 관심 있던 콘텐츠 기획 일을 하면 신나겠지?


이 회사에서는 3년 8개월을 일했다. 단순히 회계만 했다면 이렇게 오래 버티지는 못했을 것이다. 회사 안에서 출판과 콘텐츠 업무까지 담당해서 책도 만들고 행사도 열고 매거진도 기획하면서 주도적으로 일을 이끌어갔던 재미가 있어서 오래 할 수 있었다.


다만 회계 업무로도 하루를 다 쓰기 때문에 콘텐츠 업무를 하기 위해서는 계속 야근을 해야 했고, 마침(?) 교통사고로 몸이 안 좋아져 퇴사를 결심하게 되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거시적인 담론을 논하는 회사에서 벗어나 미시적인 임팩트를 직접 만들어 보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었다.


퇴사 후 갭이어를 보내면서 여러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책도 만들고 커뮤니티도 운영하고 브랜드도 론칭했다.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면서 보니 기획이 재미다는 걸 알게 됐다. 콘텐츠 기획을 업으로 삼으면 신나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준비 끝에 스타트업에서 콘텐츠 기획자로 일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처음부터 기획 일이 주어진 건 아니었다. 교육 운영에 투입되어 매일 야근에 주말 근무까지 했던 폭풍 같은 3개월이 지난 후에야 드디어 기획 업무가 주어졌다. 기회였지만 위기이기도 했다. 사수 없이 혼자 하다 보니 헛발질하는 일이 많았다. 30대 중반, 늦은 나이에 커리어를 바꾼 만큼 빠르게 성장하고 성과를 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아등바등 만들어 낸 성과는 회사도 나 자신도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았고, 잘하고 있다는 동료들의 목소리가 튕겨 나갔다. 자신감이 점점 떨어졌고 급기야는 월급 루팡이 된 것 같았다. 계약 기간을 채우고 퇴사할 수밖에 없었다.



가설 7: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함께 하면 좋겠지?


퇴사 후 콘텐츠 기획 관련 일을 하려고 시도해봤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모든 길이 닫혔다. 인턴도 계약직도 나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그런 시간이 반년 넘어가자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사회에서의 내 가치가 바닥에 떨어진 것 같았고, 이대로 영영 사회에 복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실업급여가 종료되는 시점에 알바를 다시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전에 일했던 소셜섹터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회계 팀 사람이 개인 사정으로 두 달 정도 못 나올 것 같은데 알바 해줄 수 있느냐고. 하던 일이기도 하고 회사 사람들이 좋은 곳이어서 하겠다고 했다.


그러다가 재입사 권유를 받았다. 사실은 그전에도 가끔 옛 동료들을 만나면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재입사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때는 다시 회계 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했었다. 그런데 이번 제안을 받고 생각해 보니, 내가 일을 할 때 추구하던 가치를 여기에서는 여러 개 충족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좋고(관계),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있고(인정), 이 일이 사회적으로 가치를 만들고(가치), 사회적인 지위와 수입을 주었다(안정). 여러 가치 중에 이만큼을 충족해 준다면 해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능을 활용하거나 재미를 추구하는 건 사이드 프로젝트로 채웠던 경험을 통해 하나의 일에서 모든 가치를 추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텐츠 기획 일을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주 5일 근무를 하면 사이드 프로젝트든 외주든 힘들게 해내야 하는 걸 알기에(회사 다니며 번역하다가 응급실을 방문했던 경험이 있다) 주 4일 근무를 제안했다. 논의 끝에 제안이 수락되어 지금의 반직반프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반직반프로 살아간 지 3개월 차가 되었다. 안정적인 수입이 있으면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구조여서 지금의 나에게는 아주 만족스러운 형태이기는 하다. 콘텐츠 기획이나 에디터 일 외주가 들어와도 여유롭게 처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부분도 있고, 반직반프의 단점도 있다.


주 4일 직장인, 주 3일 프리랜서의 장단점과 반직반프 생활을 하며 얻은 인사이트는 다음 글에서 나눠보고자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