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초봄, 병든 과일나무를 베어낸 시가 뒤뜰은 어딘가 휑했다. 코로나로 인해 집안에 있는 시간이 부쩍 늘어난 탓에 식구들 모두 평소보다 뒤뜰이 허전한 걸 눈치채고 있었다. 몇 번인가 정원 꾸미기에 대한 말이 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식물 키우는 걸 좋아했다는 시엄마는 정원 가꾸기에 대한 책을 몇 권 샀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뭘 하지는 않았다.
그걸 지켜보던 막내 시동생이 시아빠를 거들며 돈 벌던 걸 갑자기 그만뒀다. 지금은 푸에르토리코에 가 있는 그는 마침 집을 떠나기 전 엄마에게 뭐 해드릴 게 없나 궁리하던 차였는데 텃밭으로 쓸 수 있는 공간을 지어 선물하면 좋겠다 싶었단다.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찾아 열심히 온라인을 살피더니 머지않아 목재와 함께 하루 종일을 뒤뜰에서 보내기 시작했다.
겨울이라 비어있는 시동생 표 텃밭
두 달쯤 지난 때 뒤뜰에는 근사한 계단식 화단이 생겼다. 완성품을 공개한 막내 시동생은 난생처음 만들어 본 거라 어렵기는 했지만 보람 있었다며 뿌듯해했다. 감동받은 시엄마는 한바탕 눈물을 뿌리고 나서 새로 생긴 공간에 심을 각종 채소와 과일을 주문했다. 당근 씨, 양파 씨, 호박씨, 어린 딸기 모종 등이 연이어 도착했다.
막내 시동생을 대신해 시가 사업체에서 손을 거들기 시작한 나는 각종 씨 뿌리기와 모종 심기를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퇴근하고 나면 매번 뭐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보러 뒤뜰에 구경을 갔다. 각 식물마다 이런저런 요령이 다르게 적용되는 게 재미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 식구가 막내 시동생의 프로젝트에 감화되어 뒤뜰 여기저기에 조금씩 손을 더하기 시작했다.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그네를 매단 곳이 생겼고, 사과와 포도를 비롯해 다양한 과일 묘목이 여기저기에 심겼다. 포도넝쿨이 타고 자라면 그늘이 형성되도록 나무로 만든 아치도 주르륵 섰다.
뒤뜰이 활기를 얻자마자 막내 시동생은 푸에르토리코로, 나와 남편은 한국으로 향했다. 떠나 있는 동안 종종 시엄마로부터 열심히 자라고 있는 뒤뜰 식물 사진을 받았다. 언제나 파릇하고 보기 좋았다. 늘 여럿이 머물며 북적이던 집이 텅 비게 되었어도 텃밭을 돌보면서 허전한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고 나중에 시엄마가 말했다.
나와 남편은 7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 미국에 잠깐 돌아왔다. 뒤뜰 텃밭에는 당근이 한창이었다. 나는 생 당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환하게 웃으며 권하는 시엄마를 위해 입에 넣었는데 웬걸, 정원 당근은 놀랄 만큼 달고 맛있었다. 노지에서 키우는 채소가 맛있다는 게 이거구나 싶었다. 시엄마는 내 반응에 한참 웃었다.
그때부터 다시 한국에 가기까지 나는 당근 귀신이 됐다. 시엄마가 당근 수프라도 만들면 신이 났고 나중에는 시엄마에게 물어본 다음 입이 심심하면 뒤뜰로 나갔다. 손에 잡히는 대로 당근을 쑥쑥 뽑아 물에 씻어먹으면 그렇게 맛있었다. 한국에 가서도 엄마에게 시가 뒤뜰 당근이 진짜 맛있었다고 계속 말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분명 여름에 오면 딸기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딸기는 넝쿨만 무성하고 열매가 보이지 않았다. 남편이 어릴 때는 딸기를 백 번 심어도 마당에 풀어놓고 키우던 오리 떼가 열리는 족족 다 먹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오리는 없었고 닭도 텃밭을 가꾸기 시작한 후로는 밖에 풀어놓지 않았던 터였다.
그렇지 않아도 컸던 기대가 당근 맛 때문에 훨씬 커져서 딸기의 부재는 무척 아쉬운 일이었다. 심은 딸기 모종의 성장 속도를 알았다면 조금 더 의아해했을 테지만, 그런 걸 전혀 모르던 나는 그저 딸기 나는 때와 내가 미국에 있는 시기가 엇갈렸는가 보다 하고 말았다. 초겨울에 돌아오면 딸기 잼 정도는 있을 테니까 맛은 볼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 방문을 완전히 마치고 돌아왔을 때도 딸기는 흔적조차 없었다. 나는 창고에 쌓인 커다란 호박을 보면서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열심히 궁리하다가 결국 시엄마에게 딸기는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대번에 시엄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가 딸기는 정원 가꿀 때마다 심는데 한 번도 먹어보지를 못했다고 한 거 기억나니?”
“오리 때문에요.”
“맞아. 이번에는 오리도 없고, 닭도 가둬 놨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요?”
“옆집 토끼가 다 먹었어! 나한테 무슨 저주가 걸려 있는 게 분명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어리둥절한 내게 시엄마가 들려준 자초지종은 이렇다. 담 너머 세를 주는 다세대주택 중 한 집에 덜 전통적인 아미시인지 메노파인지 분명하지 않은 가족이 하나 들어왔는데, 그 집 막내딸이 키우는 토끼가 어떻게 알았는지 담장 아래를 파고 넘어와 채 익지도 않은 파란 딸기를 죄 먹어버렸단다. 웃음이 났다.
담 너머 풍경. 세 주는 집은 담에서도 꽤 떨어져있다.
“진짜 큰 토끼야. 귀엽기는 귀여운데, 어휴, 돼지.”
매번 주인이 찾으러 오기는 했지만 주인이 잡는 속도보다 토끼가 먹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고 했다. 나는 토끼 하면 당근을 제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당근은 안 건드린 절 보면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딸기는 넝쿨에 달려 있는데 당근은 땅 속에 묻혀 있어서 굳이 캐먹기 번거로웠던 걸 지도 모르겠다.
시엄마는 문제의 토끼가 딸기가 다 사라지고도 심심하면 담을 넘는다며 한숨을 쉬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녀석을 목격했다. 검정 털과 흰 털이 섞였는데 아닌 게 아니라 덩치가 닭보다 컸다. 더불어 녀석을 잡으러 온 토끼 주인도 만났다. 발간 볼이 통통한 십 대 초반 여자애로 토끼 잡는 걸 도우면서 조금 친해졌다. 수의사가 꿈이라고 했다.
오늘자 담을 넘은 이웃집 토끼
토끼는 오늘도 담을 넘어왔다. 마침 뒤뜰을 보고 있던 나와 남편은 토끼 주인이 오기 전에 잡아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집을 증축하는 중이라 목재가 이리저리 쌓여 있는데 그 아래로 쏙 들어가 버린 탓이다. 겁을 주는 것도 맛있는 걸로 꾀어내는 것도 먹히지 않았다. 우리는 주인이 찾으러 오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