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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두 May 24. 2021

이것도 분가일까?

따로 살긴 사는데요....


    30년 가까이 된 시가 건물에서 가장 원형을 보존한 곳, 그러니까 어떤 리모델링도 없이 오래된 곳은 다름 아니라 나와 남편이 쓰던 방에 딸린 화장실이었다. 쓰는 사람이 부지런히 쓸고 닦은 덕분에 겉보기로는 말짱한 편이었으나 낡을 대로 낡은 화장실은, 방과 화장실이 종종 찾아오는 손님에게 내어주는 게스트 룸일 때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나와 남편이 매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제 나이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된 건 서랍을 겸하는 카운터와 한 몸이던 세면대였다. 하필 달린 수도꼭지가 좌우로 가볍게 돌리거나 긴 손잡이 부분을 올렸다 내리는 종류가 아니라, 작고 둥근 버튼을 손으로 쥐고 잡아 빼고 눌러 넣는 식이었던 탓이다. 낡은 수도꼭지는 어지간한 힘으로 움직이지 않았는데, 자꾸 그걸 힘줘서 뽑았다 넣었다 하는 통에 물 담기는 부분 전체가 돌아가더니 서랍장과 분리됐다.


    이를 제 자리에 넣고 새로 본드칠을 했더니 얼마 안 가서 세면대 아래 수도관이 터져서 홍수가 났다. 아침에 비몽사몽 한 채 화장실에 발을 들였다가 축축한 양말에 눈을 번쩍 떴다. 서랍장 아래 변기 청소 용품이 담겨있던 탓에 그 물에서는 더러운 변기 냄새가 났다. 우리는 역시 낡은 변기가 샌 건지, 아니면 세면대가 문제인 건지 알아내는 내내 울상이었다. 샤워 부스 앞에 깔아 뒀던 깔개는 쓰레기통으로 갔다.


    예전 글에 적은 집안 공사가 여전히 이어지던 중이라 집 안에는 매일 인부가 드나들고 있었다. 우리는 그중 총책임자에게 부탁해 화장실을 살피게 했다. 고칠 수 있느냐는 말에 요모조모를 살펴본 그는 지금 시설이 하도 노후해서 새 관을 넣어 고치는 것보다 어차피 집의 다른 부분도 뜯어고치는 중이니 다 부수고 새로 하는 게 낫겠다고 했다.


새단장중인 낡은 화장실

    언제나 낡은 화장실을 맘에 들어하지 않던 시엄마는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렸다. 그날 퇴근한 나와 남편은 빈 공간만 남기고 사라진 화장실 앞에서 입을 벌렸다. 기대하지 못한 빠른 결단과 실행이었다. 다른 일에도 그 부수던 속도 절반만 했으면 지금쯤 시가는 새 집이 되었을 거다. 안타깝지만 시가 공사는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지금도 진행 중이다. 절반도 채 안 끝났다.


    이 일이 계기가 돼서 나와 남편은 따로 집을 구해 나가겠다고 분가를 선언했다. 매번 계단을 오르내리며 화장실 쓰는 게 귀찮기도 했고, 안방 공사가 시작되기 직전이라 시가 어른이 지낼 공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어차피 일을 시가 사업에서 하니 멀리 가지는 않을 거고, 동네 안에서 구해볼 테니 한 달 정도 기다렸다가 우리 방으로 옮기면 되겠단 말에 시엄마는 어쩐지 울상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학에 가지 않고 집안 사업에 뛰어들었던 탓에 성인이 되고도 집을 떠난 적 없던 시동생 1은 우리 이야기에 꽤 솔깃해했다. 엄마아빠의 그늘을 떠나 분리된 공간을 가진다는 점은 맘에 드는데 혼자 덜컥 나가기는 부담이 됐다며 집세 반을 부담할 테니 나갈 때 저도 데리고 가라고 했다. 나와 남편은 곧 동의했다. 우리는 둘이고 저는 혼자인데 반이나 떠안겠다는 걸 만류할 이유가 없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은 친구가 시형제와 사는 게 불편하지 않으냐 했는데, 사실 처음에 조금 망설이긴 했다. 시동생 1은 막내에 비해서 몹시 잘 삐지는 편이라 귀찮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시가 사람이라는 이유로 불편해 하기에는 내가 며느리/형제의 아내보다는 입양한 자식/늘어있는 형제에 가까운 존재가 된 지 오래라 일 없었다.


    어쨌든 의기투합한 우리 셋은 나갈 집을 알아봤다. 처음에는 시가에서 살짝 떨어진 곳으로 갈 예정이었다. 차가 있으니 운전해서 10분 내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한참 여기저기 보고 다니던 중, 시엄마가 세 주는 여러 채의 집 관리인이 우리에게 연락을 줬다. 시가가 선 언덕 아래에 있는 다세대주택 중에 조만간 비는 곳이 있다고 했다. 보증금은 당연히 필요 없고, 가족 할인으로 전기, 가스, 수도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이사한 집에서 시가 올라가는 길

    해당 집은 시가에서 걸어서 3분 거리, 시가를 통과해서 가면 일터까지 6분 거리로 운전이 아예 필요 없었다. 솔깃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었다. 거기에 시엄마가 밥은 와서 먹으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모두는 자식이 한 번에 집을 떠날 거란 생각에 쓸쓸해진 시엄마의 꾀였다. 관리자는 우리가 들어가겠다고 하자 며칠에 걸쳐 온 집안 벽 페인트칠을 새로 하고 이것저것 손을 봐서 새 집처럼 단장해줬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가진 짐을 거의 다 가지고 이사한 집은 2층짜리고, 방 세 개에 화장실 세 개가 있다. 셋이 쓰기에는 크기도 넉넉하고 깔끔하다. 거실에는 본래 시가 1층 놀이방에 있던 티브이를 옮겨 달았고, 온갖 게임 기기도 고스란히 옮겨놔서 짬짬이 애들끼리 놀기 좋다. 제일 큰 방은 시동생에게 주고 나와 남편은 방 두 개를 각각 침실과 공부방으로 꾸몄다.


    그러나 우리가 새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생각보다 적다. 잠잘 때, 공부할 때, 간간히 비디오 게임할 때 정도다. 특히 널찍한 주방은 잠들기 전 찻물 끓일 때를 빼면 쓰이는 일이 딱히 없는데, 매 끼니를 언덕을 올라 시가에서 해결하기 때문이다. 주말에는 아예 아침부터 시가에 올라가 가족끼리 보드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본다.


    다르게 말하면 시가 1층에 살 때나 지금이나 생활 패턴이 똑같다. 엄마 아빠 바쁠 때 애들끼리 우르르 가는 곳이 1층이냐, 아니면 뒤뜰 바깥으로 나가서 있는 곳이냐 정도 차이다. 어느 순간부터 온 식구가 우리 새 집을 ‘놀이방’이라고 부르는데 위화감이 하나도 없는 건 그래서일 거다. 이걸 분가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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