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빙과 여행으로 세부 CEBU 한 바퀴 (5)
원래 이번 세부 근방 투어 메인 목적지는 환도상어로 유명한 '말라파스쿠아(Malapascua)'였다.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이름마저 생소한 환상의 섬. 연말 성수기에 도착하는 일정이었기에 일찌감치 다이빙샵 예약을 마치고 예약금까지 걸어둔 상태였다.
그런데 출발 전날, 필리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태풍 때문에 배가 아예 뜰 수 없습니다. 다이빙은 전면 취소이고, 섬에 들어올 수 있을지도 미지수입니다."
아아... ‘나쁜 크리스마스’ 라는 섬 이름에 걸맞게, 하필 크리스마스 연휴에 딱 맞춰 태풍이....
망망대해에 떠있는 작은 섬인데다, 세부 본섬 끄트머리에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태풍의 영향이 컸나보다. 샵 사장님은 성수기 장사도 모두 포기하고 모든 예약을 취소해야한다며 울상이셨다.
하지만, 정작 더 울고 싶은건 나였다. 이번 여행의 메인이 말라파스쿠아였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이 선호하는 필리핀 최고의 휴양지이며, 다이버들에게는 환상적인 경험을 제공한다는, 말로만 들었던 바로 그 섬.
그래도 간다.
여행의 스타트를 보홀로 바꾸고, 모알보알에서 새해를 맞이한 뒤, 멀고 먼 길을 돌아 말라파스쿠아를 결국! 가기로 했다. 모알보알-말라파스쿠아는 큰 세부섬의 끝과 끝이라 육로와 해로를 합쳐 거의 7시간이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하지만 이 환상의 섬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이동시간쯤이야...!
새벽같이 모알보알을 출발했다. 잠은 5시간이 걸리는 육로 이동 중에 충분히 보충할 수 있으니까. 단 몇시간이라도 말라파스쿠아에 더 있을 수 있다면 힘겨운 새벽 기상쯤이야.
화장실도 들를겸 잠시 쉬어가기로 한 곳은 나름의 휴게소 같은 가게였다. 몇가지 식사와 간단한 간식거리를 팔면서 -유료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곳이었는데, 딱 봐도 '저 여행 중이에요'라고 써붙인 금발의 여행자들이 사설 버스에서 종종 내렸다 탔다. 이곳을 이용할 정도면 저들도 우리처럼 멀고 먼 길을 가고 있으리라.
그러고도 한참을 더 가야하는, 정말 긴 여정이었다. 각오는 했지만 편하지도 않은 좌석에 장시간 앉아있는 것은 꽤나 고역이었다. 꼬리뼈가 욱씬거려 한참을 뒤척이다 한번 더 쉬자고 할까... 했을때쯤, 말라파스쿠아로 들어가는 관문인 마야항 근처에 도착했다. .
이름만 '뉴(new)'하고 이름만 '포트(항구)'이지, 도착한 마야항은 그냥 허허벌판이었다. 한쪽 구석에선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걸로 봐서 '이제 항구를 짓기 시작할거야..'라는 의미의 뉴 포트였던걸까.
필리핀이긴 하지만, 그래도 몇년 뒤, 저 공사가 끝나고 나면 이 풍경 따윈 잊혀질만한 진짜 '뉴 포트'가 들어서 있을까.
우리가 갈 다이빙샵에서 분명 배를 잡아 놓았다고 했는데, 항구에는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도 없어 어디에 물어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방황하는 우릴 보더니, 항구 입구의 직원인듯한 아주머니가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다행히 영어로 안내 되어 있는 입항 서류를 무사히 작성하고 안전바 하나로 허허벌판과 나뉘어져 있는 항구 안으로 들어섰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고등학생쯤 되어보이는 시크한 표정의 아이가 다가와 또 자기를 따라오랜다. 마치 우리가 어디 갈지 다 안다는듯이. (놀랄만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 허허벌판 위에 승객처럼 보이는 건 우리 둘과 머리가 하얀 노신사 한명이 다였으니까.)
끈기 있는 여행자들은 항구에 사람이 많이 몰리는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섬으로 들어가는 서양인 여행자들과 조인해서 방카 보트 삯을 나눠 내기도 한다던데, 승객보다 일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이 풍경을 보고 있자니 그런 천운을 바라는건 무리일 것 같았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았지만, 그저 손짓발짓에 이끌려 왔다갔다하다보니 우린 어느새 다 부서져가는 작은 플랫보트 위에 태워져 있었다. 분명히 커다란 방카보트를 타고도 1시간을 가야하는 긴 뱃길이라고 들었는데, 서.. 설마 이 작은 보트로 이 드넓은 바다를 건널 생각인걸까?... 항구에 내린 이후부터 영어라곤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기에, 우리의 불안감을 해결할 길은 없었다. 그저 이 보트가 뒤집어지지 않도록 가만히 배에 앉아있는 수밖에 없었다. 내 등 뒤에 놓인 가방이 배 바닥에 찰랑거리는 바닷물에 흠뻑 젖어버릴까 걱정하면서.
다행히 십여분을 삐걱이며 노 저어가던 플랫보트는 곧 수평선 근처에 있던 커다란 방카보트 근처에 멈춰 섰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간조(low tide) 때라 선체가 깊은 방카보트가 해변가에 배를 댈 수 없어 플랫보트로 사람들을 실어 날랐던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전에 아무런 정보가 없었던 우린 이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널 것이라는 어이없는 상상을 했던 것.
힘겹게 올라탄 방카보트는, 컸다.
파도가 조금 친다 해도 뒤집어지지 않을 만큼은 컸다. 하지만 바위에 한번 부딪힌다면 산산조각이 날 것처럼 낡아 있었다.
배는 웃통을 시원~하게 벗어던진 고단한 표정의 아저씨가 운전 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세게 밟으면 나무바닥이 꺼져버릴 것 같은 이 배의 행색은 아저씨의 고단한 표정과 고단할 것이 분명한 삶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당장 판자 하나가 떨어져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이 배는, 다른 방카들처럼 엔진이 튼튼하지 못해서 배가 바위 근처를 지나갈라치면 긴 막대기로 바닥을 밀어 바위를 피해야 했다. 그 일을 도맡은건 선장 아저씨의 착실한 아들임이 분명한 남자아이였다. 우리 나이로 중학생쯤 되었으려나. 깡마른 체구에 아저씨의 고단한 표정을 빼다박은 아이는 어울리지 않는 탄탄한 팔근육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키를 잡고 있으면 자기보다 키가 큰 손님들의 캐리어를 낑낑대며 배로 날랐고, 배가 출발해야 하면 온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자기 키의 두배는 되어보이는 장대로 배를 밀어냈다.
학교에 가야 할 시간에 자기 아들한테 이런 노동을 시켜도 되는거냐고 비난하기엔, 아저씨의 표정이 너무도 고단했다.
그리고 배의 한 구석엔 기다란 장대를 든 형을 자랑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다섯살쯤 되어보이는 꼬맹이가 앉아 있었다. 아마도 자기 형이 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어 보일. 곧 저 장대를 손에 쥐고 어울리지 않는 팔근육을 가지게 될 꼬마아이.
7시간의 고된 여정이었지만, 방카 끄트머리에 지친 몸을 구겨 앉은 두 꼬마를 보고 있자니 더 이상 힘들다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벌써부터 매일 아침 노동의 현장으로 아버지를 따라나서고 있을 저 아이들의 눈에, 자기 키만한 짐가방을 들고 이 섬에 놀러온 깔끔한 차림의 외국인들은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탈탈거리는 모터 소리와 함께, 지상 낙원이라는 말라파스쿠아에 도착했다.
그렇게도 우릴 유혹하던 이 매혹적인 섬은, 상상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웠다. 게다가, 방카에서 만난 두 아이들 덕분에, 이런 아름다운 섬에서 휴일을 만끽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어느때보다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누군가에게는 꿈도 꾸지 못할 이런 휴가를, 낭비하지 않고 값지게 보내리라...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제 본격적인 '환도상어' 이야기가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