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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석천 Mar 26. 2017

말라파스쿠아로 가는 길

다이빙과 여행으로 세부 CEBU 한 바퀴 (5)

원래 이번 세부 근방 투어 메인 목적지는 환도상어로 유명한 '말라파스쿠아(Malapascua)'였다.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이름마저 생소한 환상의 섬. 연말 성수기에 도착하는 일정이었기에 일찌감치 다이빙샵 예약을 마치고 예약금까지 걸어둔 상태였다.

그런데 출발 전날, 필리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태풍 때문에 배가 아예 뜰 수 없습니다. 다이빙은 전면 취소이고, 섬에 들어올 수 있을지도 미지수입니다."


아아... ‘나쁜 크리스마스’ 라는 섬 이름에 걸맞게, 하필 크리스마스 연휴에 딱 맞춰 태풍이....

망망대해에 떠있는 작은 섬인데다, 세부 본섬 끄트머리에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태풍의 영향이 컸나보다. 샵 사장님은 성수기 장사도 모두 포기하고 모든 예약을 취소해야한다며 울상이셨다.


하지만, 정작 더 울고 싶은건 나였다. 이번 여행의 메인이 말라파스쿠아였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이 선호하는 필리핀 최고의 휴양지이며, 다이버들에게는 환상적인 경험을 제공한다는, 말로만 들었던 바로 그 섬.


그래도 간다.


여행의 스타트를 보홀로 바꾸고, 모알보알에서 새해를 맞이한 뒤, 멀고 먼 길을 돌아 말라파스쿠아를 결국! 가기로 했다. 모알보알-말라파스쿠아는 큰 세부섬의 끝과 끝이라 육로와 해로를 합쳐 거의 7시간이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하지만 이 환상의 섬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이동시간쯤이야...!



새벽같이 모알보알을 출발했다. 잠은 5시간이 걸리는 육로 이동 중에 충분히 보충할 수 있으니까. 단 몇시간이라도 말라파스쿠아에 더 있을 수 있다면 힘겨운 새벽 기상쯤이야.

화장실도 들를겸 잠시 쉬어가기로 한 곳은 나름의 휴게소 같은 가게였다. 몇가지 식사와 간단한 간식거리를 팔면서 -유료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곳이었는데, 딱 봐도 '저 여행 중이에요'라고 써붙인 금발의 여행자들이 사설 버스에서 종종 내렸다 탔다. 이곳을 이용할 정도면 저들도 우리처럼 멀고 먼 길을 가고 있으리라.


그러고도 한참을 더 가야하는, 정말 긴 여정이었다. 각오는 했지만 편하지도 않은 좌석에 장시간 앉아있는 것은 꽤나 고역이었다. 꼬리뼈가 욱씬거려 한참을 뒤척이다 한번 더 쉬자고 할까... 했을때쯤, 말라파스쿠아로 들어가는 관문인 마야항 근처에 도착했다.  .

하.. 항구는 어디있죠? Maya new port, Philippines ⓒ제석천

이름만 '뉴(new)'하고 이름만 '포트(항구)'이지, 도착한 마야항은 그냥 허허벌판이었다. 한쪽 구석에선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걸로 봐서 '이제 항구를 짓기 시작할거야..'라는 의미의 뉴 포트였던걸까.

필리핀이긴 하지만, 그래도 몇년 뒤, 저 공사가 끝나고 나면 이 풍경 따윈 잊혀질만한 진짜 '뉴 포트'가 들어서 있을까.


우리가 갈 다이빙샵에서 분명 배를 잡아 놓았다고 했는데, 항구에는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도 없어 어디에 물어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방황하는 우릴 보더니, 항구 입구의 직원인듯한 아주머니가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다행히 영어로 안내 되어 있는 입항 서류를 무사히 작성하고 안전바 하나로 허허벌판과 나뉘어져 있는 항구 안으로 들어섰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고등학생쯤 되어보이는 시크한 표정의 아이가 다가와 또 자기를 따라오랜다. 마치 우리가 어디 갈지 다 안다는듯이. (놀랄만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 허허벌판 위에 승객처럼 보이는 건 우리 둘과 머리가 하얀 노신사 한명이 다였으니까.)

여기가 선착장이라면 선착장. Maya new port, Philippines ⓒ제석천

끈기 있는 여행자들은 항구에 사람이 많이 몰리는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섬으로 들어가는 서양인 여행자들과 조인해서 방카 보트 삯을 나눠 내기도 한다던데, 승객보다 일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이 풍경을 보고 있자니 그런 천운을 바라는건 무리일 것 같았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았지만, 그저 손짓발짓에 이끌려 왔다갔다하다보니 우린 어느새 다 부서져가는 작은 플랫보트 위에 태워져 있었다. 분명히 커다란 방카보트를 타고도 1시간을 가야하는 긴 뱃길이라고 들었는데, 서.. 설마 이 작은 보트로 이 드넓은 바다를 건널 생각인걸까?... 항구에 내린 이후부터 영어라곤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기에, 우리의 불안감을 해결할 길은 없었다. 그저 이 보트가 뒤집어지지 않도록 가만히 배에 앉아있는 수밖에 없었다. 내 등 뒤에 놓인 가방이 배 바닥에 찰랑거리는 바닷물에 흠뻑 젖어버릴까 걱정하면서.

나... 나.. 나는 괜찮다.. 나는 무섭지 않다... Maya new port, Philippines ⓒ제석천

다행히 십여분을 삐걱이며 노 저어가던 플랫보트는 곧 수평선 근처에 있던 커다란 방카보트 근처에 멈춰 섰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간조(low tide) 때라 선체가 깊은 방카보트가 해변가에 배를 댈 수 없어 플랫보트로 사람들을 실어 날랐던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전에 아무런 정보가 없었던 우린 이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널 것이라는 어이없는 상상을 했던 것.


힘겹게 올라탄 방카보트는, 컸다.

파도가 조금 친다 해도 뒤집어지지 않을 만큼은 컸다. 하지만 바위에 한번 부딪힌다면 산산조각이 날 것처럼 낡아 있었다.

배는 웃통을 시원~하게 벗어던진 고단한 표정의 아저씨가 운전 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세게 밟으면 나무바닥이 꺼져버릴 것 같은 이 배의 행색은 아저씨의 고단한 표정과 고단할 것이 분명한 삶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성실한 일꾼의 조금은 서글픈 뒷모습 Maya new port, Philippines ⓒ제석천

당장 판자 하나가 떨어져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이 배는, 다른 방카들처럼 엔진이 튼튼하지 못해서 배가 바위 근처를 지나갈라치면 긴 막대기로 바닥을 밀어 바위를 피해야 했다. 그 일을 도맡은건 선장 아저씨의 착실한 아들임이 분명한 남자아이였다. 우리 나이로 중학생쯤 되었으려나. 깡마른 체구에 아저씨의 고단한 표정을 빼다박은 아이는 어울리지 않는 탄탄한 팔근육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키를 잡고 있으면 자기보다 키가 큰 손님들의 캐리어를 낑낑대며 배로 날랐고, 배가 출발해야 하면 온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자기 키의 두배는 되어보이는 장대로 배를 밀어냈다.


학교에 가야 할 시간에 자기 아들한테 이런 노동을 시켜도 되는거냐고 비난하기엔, 아저씨의 표정이 너무도 고단했다.

그리고 배의 한 구석엔 기다란 장대를 든 형을 자랑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다섯살쯤 되어보이는 꼬맹이가 앉아 있었다. 아마도 자기 형이 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어 보일. 곧 저 장대를 손에 쥐고 어울리지 않는 팔근육을 가지게 될 꼬마아이.


7시간의 고된 여정이었지만, 방카 끄트머리에 지친 몸을 구겨 앉은 두 꼬마를 보고 있자니 더 이상 힘들다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벌써부터 매일 아침 노동의 현장으로 아버지를 따라나서고 있을 저 아이들의 눈에, 자기 키만한 짐가방을 들고 이 섬에 놀러온 깔끔한 차림의 외국인들은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천상의 낙원, 말라파스쿠아. Malapascua Island, Philippines ⓒ제석천

탈탈거리는 모터 소리와 함께, 지상 낙원이라는 말라파스쿠아에 도착했다.


그렇게도 우릴 유혹하던 이 매혹적인 섬은, 상상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웠다. 게다가, 방카에서 만난 두 아이들 덕분에, 이런 아름다운 섬에서 휴일을 만끽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어느때보다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누군가에게는 꿈도 꾸지 못할 이런 휴가를, 낭비하지 않고 값지게 보내리라...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제 본격적인 '환도상어' 이야기가 옵니다.)

https://brunch.co.kr/@jesuckchun/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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