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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석천 Feb 17. 2017

모알보알, 필리핀의 새해는 팡팡팡!

다이빙과 여행으로 세부 CEBU 한 바퀴 (4)

작년에 이어 올해도 필리핀에서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 새해 첫날부터 집을 비우는게 부모님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더 이상 수십번도 더 본 똑같은 타종 영상을 보며 새해를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새해의 각오를 다지는 동시에 내 지난 한해를 조용히 돌아볼 수 있는 한적한 곳에서 2017년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래서 모알보알을 선택했다. 언제나 그림같은 하늘이 걸려있는 곳. 소박하고 조용하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들과 새해 인사는 나눌 수 있는 곳. 운이 좋다면 물 속에서 새해를 맞이할 수도 있는 그런 바다까지 있는 이곳.

이 하늘 때문에... / Moalboal, Philippines ⓒ제석천

적도에 가까운 지역이라 구름이 낮고, 아직 때 묻지 않은 시골이라 공기는 늘 청명하다. 그 덕분에 하늘은 아무렇게나 카메라를 갖다 대도 한 폭의 액자가 된다.


뾰족뾰족한 서울의 스카이라인 아래에서 화려한 TV 영상을 보는 대신 탁 트인 이 하늘 아래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며 새해를 맞이한다는 것은, 나처럼 평생을 서울에 갇혀 살아 온 서울촌놈에겐 최고의 호사가 아닐 수 없다.



Moalboal, Philippines ⓒ제석천

2016년의 마지막 날. 프리다이빙을 한다는 동네 청년이 작살 하나 들고 바닷물 속으로 뛰어 들더니, 어린아이 키만한 자이언트 바라쿠다 Giant Barracuda(갈치 비슷한 대형 물고기)를 잡아가지고 나왔다.

아직 젊어보이는 청년이지만 일찌감치 결혼을 하는 필리핀 사람들의 특성상 이미 먹여살려야 할 가족이 여러명 있을 것이다. 오늘 저 집의 섣달그믐 만찬에는 온 식구가 다 먹어도 배부를 바라쿠다 구이가 상에 오를테니, 청년은 물질 한번으로 가장의 노릇을 톡톡히 해낸 셈이다.

새 '해'를 데려올 노을이 진다 / Moalboal, Philippines ⓒ제석천

필리핀에서 12월은 축제와 같은 달이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가 가장 큰 명절이자 축제인 필리핀 사람들. 12월에는 통상적으로 임금을 2배로 받는다. 우리나라의 연말 보너스 같은 개념이랄까.

그런데 안타깝다면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보너스 월급을 12월 31일에 모두 탕진한다는 사실이다. 가족끼리 성대한 파티를 열고 집집마다 대량의 폭죽을 사들여 불꽃을 쏘아올린다. 필리핀에서는 연말에 폭죽을 얼마나 많이, 또 화려하게 터뜨리는가가 부의 척도가 되며 또 그 집안의 위상(?)을 결정하기 때문에 섣달그믐 밤에는 온 동네가 터져나갈듯이 곳곳에서 자기 집의 폭죽을 자랑한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이 폭죽놀이를 보는 것도 필리핀에서 새해를 맞는 또 하나의 재미이다. 따져보면 그 집 가장의 한달 월급이 하늘에서 폭발하는 슬픈 광경이긴 하지만.



비록 타지에 있는 몸들이지만 새해 첫날 떡국을 빠뜨릴 수 있으랴. 자정에 있을 불꽃놀이를 기다리던 몇몇 여성 손님들과 숙소 사모님이 팔을 걷어붙이고 떡국에 들어갈 만두를 손수 빚었다.

일부러 고향 등지고 좋은데서 새해 맞이하겠다고 온 사람들이면서도 설 떡국은 포기할 수가 없나보다. 누구보다 내가 제일 그렇지만.


만두빚기도 마치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산 미구엘 한병씩 나누던 가운데,

2017년 1월 1일을 15분 앞두고

드디어 첫 폭죽이 터졌다.

Moalboal, Philippines ⓒ제석천

새까만 하늘과 검푸른 바다를 화려하게 물들인 이 첫 불꽃이 마치 신호탄이라도 되는 양, 기다렸다는 듯 온 동네에서 연달아 폭죽을 쏘아올리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때 보홀에서도 이미 한차례 구경했던 광경이지만, 이번에는 차원이 다르다. 끊이지 않는 불꽃 덕분에 하늘이 하얘지고 온 동네가 밝아졌다. 바다 건너편 섬에서 터뜨리는 불꽃이 여기서도 보일 정도였다. 이 작은 시골 마을의 규모가 이 정도면 세부 시티나 마닐라쯤 가면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작년에는 병맥주를 들고 바다 위에 정박해놓은 배 위까지 헤엄쳐가서 배 위에서 폭죽을 감상했더랬다. 해안가를 따라 마을이 발달되어 있는 곳이라, 바다에서 육지쪽을 바라보니 온 동네 불꽃을 다 잘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바다 상태가 여의치 않아 배에서의 관람은 포기하고, 길거리 -라고 해봤자 작은 골목들뿐이지만-로 나가보았다.

Panacsama beach, Moalboal, Philippines ⓒ제석천

세계 각지의 다이빙샵이 모여있는 파낙사마 비치 근처의 골목 골목은 한밤중인데도 축제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다. 오늘은 어린 아이들도 늦게까지 잠들지 않고 떼지어 길거리를 뛰어다닌다.

평소에는 해가 지고 나면 술집에도 손님이 별로 없는 조용한 동네이건만, 명절은 명절인가보다.

Moalboal, Philippines ⓒ제석천

여기 저기서 쏘아올리는 거대한 불꽃으로도 모자랐는지, 아이들은 막대폭죽을 들고 나와 길거리를 밝힌다. 더 어린 꼬마들은 엄마 손을 꼭 붙잡고 화려한 불꽃놀이를 두 눈에 담는다. 자정이 지난 시각에도 거리는 소란스럽고 활기가 넘친다.


내가 시끄럽고 복잡한 곳을 벗어나려 이리로 왔었다는 사실도 잊고, 그 소란스러움이 너무 신이 난다. 지축을 울리는 폭죽 소리도 거슬리지 않고 오히려 고맙고 벅차다.

마치 저 폭죽들이 내 지난 불운들을 달고 하늘로 올라가 모두 태워버릴 것 같아서. 저 높은 곳에 올라가 새해의 행운을 담아 와 나에게로 떨어지기라도 할 것 같아서.


(드디어, 지상낙원 '말라파스쿠아'로 이동합니다.)

https://brunch.co.kr/@jesuckchun/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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