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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처녀 Sep 27. 2017

여행이라는 오해

2017.9.24-27, 리투아니아 빌니우스


익숙하지 않은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여행자는 그 여행지의 본질이 아름다움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사진에 담기는 그 다름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동해야 할 명분을 제공한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도 함부로 낙관한다. 집에서 따온 앵두나 산딸기를 작은 바구니에 담아서 파는 백발의 노인들, 아이 하나를 안고 하나를 유모차에 태워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이 엄마. 가난한 나라로 보였지만 그만큼 물가도 쌌다. 그들의 옅은 웃음 속에는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평화가 담겨있다고, 왜 나의 모국의 풍경 속에는 저러한 평화가 없는지를 아쉬워하게 된다.

그렇게 빌니우스라는 리투아니아의 수도에 '콩깍지'가 씌인 채로 일몰과 도시의 야경을 신나게 구경하던 나는, 아무도 찾지 않는 작은 현대미술관에 들어갔다가 내가 얼마나 그들의 삶을 오해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프랑스,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 대부분의 시간 역사의 주인이었던 나라들의 예술은 도전의 역사였다. 기존의 흐름을 깨어버리면서 새로운 개념의 예술을 창출해낼때야 예술가는 인정받을 수 있었다. 대부분 시간 순서대로 전시가 구성되는 국립현대미술관들의 전시는 이렇게 도전과 개혁의 역사였다. 그들의 뒤에는 (물론 생전에 그림 한 장 제대로 못 팔던 가난한 화가들도 많았으나) 예술에 돈을 투자할 여력이 충분한 국가와 자본가들이 있었다. 꼭 직접적으로 후원을 받지 않았더라도, 예술을 중시하는 분위기 라는 것이 깔려있었다.


그렇게 형이상학적인 도전의 역사였던 서유럽의 현대미술만을 보다가 리투아니아 내셔널갤러리에서 만난 그들의 미술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일단 리투아니아에 와서야 이곳이 동유럽이 아닌 북유럽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춥고 우중충한 북유럽 기후가 그들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인지 풍경화나 일상을 그린 그림들마저도 굉장히 분위기가 음산하고 우울했다.

그 지역적 특성인 우울함은 다른 나라로부터의 지배라는 역사와 함께 극대화된다. 이 작은 나라는 러시아, 폴란드, 독일 등 강대국들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 우리나라처럼 19-20세기 내내 다른 나라들의 지배 하에 있어야 했다. 그 역사가 안그래도 음산한 그들의 예술세계에 녹아들기 시작했는데, 특히 1940년 소련에 편입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짙어졌다. 소위 '주류'로 분류되는 유럽 본토의 예술과는 사상적인 이유로 완전히 차단된 뒤, 리투아니아의 예술가들은 그림을 사회적 저항의 수단이자 현실의 기록 창구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1990년 소련 연방 소속 국가 최초로 독립을 선언하기까지의 50년간, 그들의 고통은 예술 속에 너무나도 아프게 녹아들었다. 그들의 그림 속에는 팔다리가 피투성이인 아기와 바람이 몰아치는 숲을 무거운 짐을 이고 걷는 난민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차에 깔린 고양이와 가슴에 총을 맞고 길에 버려져있는 남자의 모습도 그려졌다. 추상화마저 붉은 배경에 거칠게 검은 선을 그어놓는 등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그 역사가 남긴 상처는 치유되지 않아서, 그들의 작품 속에는 가난과 공허와 피와 절규와 인간의 잔인한 본성 같은 것이 잔뜩 담겨 있었다. 고문을 연상케하는, 피 때문에 반투명해진 수조 안에 담긴 남자가 고통스러워하며 발끝과 손끝을 떠는 비디오 아트 앞에서는 눈을 감아버려야 했다. 리투아니아의 현대 예술가들이 찍은 빌니우스의 사진 연작 속에는 거대한 잿빛 구조물들이 대표적인 관광지 한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있었는데, 그것 역시 아직 뽑혀나가지 않은 과거의 잔해들을 연상시켰다.



11개의 전시실 하나하나에 들어가는 것이 고통이었다. 왜 이 박물관에, 나하고 두 사람 정도 말고는 관람객이 없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유럽 미술관 아무 곳에나 가도 볼 수 있는, 그 흔한 유명 화가들의 작품 하나 없는 내셔널갤러리. 그들의 예술은 그렇게 조용히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미술관에서 나와 거리를 걷다보니 미술관에 들어가기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올드타운 내 텅 비어버린 집들과 깨져버린 창문, 벼룩시장 곳곳에서 보이는 군복이나 낡은 시계 등 구소련의 흔적들, 관광지 앞에서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걸인들의 슬픔과 너무 열심히 일하는 리투아니아 사람들의 표정 같은 것들이. 내 눈에 다시 보이기 시작한 이 풍경들 역시 또 다른 오해일 것이다. 그래도 하나의 오해만을 하는 것보다는 여러 방식으로 오해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이 도시를 또 한번 오해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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