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희동처녀 Sep 25. 2017

중력의 법칙이 달라지는 곳

2017.9.4-12, 포르투갈 포르투

포르투는 중력이 다르게 흐르는 도시다. 20도가 넘는 포트와인을 맛있다고 병째 비워버리고 세상을 바라봐서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2달이 넘어가는 긴 여행에 지쳐서, 나를 붙들어매던 의미없는 의무감을 살포시 내려놓고 아무것도 안 하며 시간을 보내서 세상으로부터의 중력이 옅어져서였을지도.

그러나 나는 정말로 - 포르투에서는 중력이 다른 도시에서와 다르게 작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유 중 하나는 도로였다. 포르투는 리스본과 마찬가지로 오르막과 내리막을 정비하지 않은 채 울퉁불퉁한 원래 땅 위에 도로를 깔고 건물을 지은 도시였다. 다만 리스본이 하나의 거대한 산이라면 포르투는 작은 언덕들이었다. 전망대 위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면 한 눈에 들어오는 리스본과 달리, 포르투는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이동하면서 그 사이의 사거리라든지 광장 같은 것들을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였다.

그렇게 V자 모양으로 만들어진 도로의 한쪽 꼭대기에서 반대편을 바라보면, 마치 일자로 만들어진 아스팔트 도로를 거인이 양 손으로 밀어서 살짝 접어버린 것 같았다. 반대편에 있는 집들, 그리고 이 V자를 따라 놓인 상점들은 정말 수평을 맞춰 살고 있기는 한 걸까. 어쩌면 정확히 수평이 맞지 않지만 그 상태가 익숙해져서 그들의 평온한 삶의 기준이 되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영화 '인셉션' 속에서 루시드 드림에 들어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엘렌 페이지가 함께 접어버린 프랑스 파리의 풍경 같았다. 영화에서 CG로나 가능했던 풍경을 직접 눈 앞에서 바라보는 비현실적인 순간.


중력이 뒤틀리는 또 다른 경험은 포르투에서 가장 유명한 동루이스 1세 다리 위에서 야경을 보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서였다. 숙소에서 만난 한국인 D, D의 친구이자 세계여행 중인 부부, 그리고 나. 이렇게 우리 넷은 그 다리 위에 함께 서 있었다. 달은 그 뒤에서 엄청나게 몸에 좋은 유기농 달걀처럼 새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노란색보다는 주황색에 가까운 빛으로, 검푸른 하늘 한 가운데 거대하게 콕 박혀서.   

평소보다 훨씬 크게 보이는 그 달은 하늘에서 푸른 빛이 사라지고 먹처럼 검어질 때까지 우리를 따라왔다. 짙은 주황빛으로 빛나는 대리석의 건물들과 그 아래, 여전히 분수가 뿜어져나오고 비둘기 깃털이 지저분하게 흩날리는 포르투 극장 앞에서 나는 하늘을 보았다. 별, 구름 한 점 없는 새까만 하늘에 이제는 조금 노란 빛을 되찾은 달이 놓여 있었다. 달의 형태와 무늬 그리고 빛깔이 너무 선명해서 마치 손을 뻗어 잡으면 골프공처럼 조그맣게 손바닥 안에 들어올 것만 같았다.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그 달을 바라보다보니 달과 나 사이의 거리가 평소보다 굉장히 짧아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달과 지구 사이의 실제 거리가, 그 사이의 중력이 달라졌을리가 없으니 내가 달라진 것이다. 나는 그렇게 결론내렸다. 나를 둘러싼 지구의 중력은 평소보다 조금 더 달에, 우주에, 지구와 달 사이 아무것도 없는 그 진공의 공간의 영향을 받아 조금 옅어져있었다.


여행이란 사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몸담고 있는 세상이라는 공간, 발붙인 두 땅으로부터의 너무 센 중력을 덜어주는 역할을 할 뿐이지. 여행이 줄 수 있는 교훈은 이미 출발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잖아. 여행이란 애초에 아무리 그 안에 들어가겠다고 노력해도 그저 철창 밖에서 타인들의 삶을 구경하는, 인간 동물원을 방문하는 것과 비슷한 일일 뿐이야.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이란 뻔할 뻔자지. 사람들 사는게 다 거기서 거기구나.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야겠구나. 그러다가 다시 돌아가서 마주할 삶만 괴로워지고, 헛된 몽상만 하면서 살게 만드는 게 여행 아닌감?

여행에서 이런 순간 - 세상의 중력이 뒤틀리고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타인의 삶들을 경험하는 순간 - 이 주는 감동이 잠잠해지고 차분해지고 나면 간혹, 아주 간혹 이런 질문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여행이 줄 수 있는 교훈이란 그렇게 단순한, 이미 내가 다 알고 있는 것들이 아닌가 하는. 어쩌면 긴 여행을 나오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이번 여행에서 내가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은 이미 정해져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다가도 다시금 지난 시간들을 생각하며, 달라진 중력으로 인해 변해버린 나의 마음가짐을 생각하며, 나는 역시 여행이야 - 라고 결론내린다. 8시간의 시차로 인해 스마트폰이 잠잠해진 늦은 오후의 고요를 천천히 음미하면서.  

작가의 이전글 반 고흐의 일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