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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처녀 Sep 09. 2017

반 고흐의 일몰

2017.7.26-28,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고흐 박물관


그의 삶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나는 다시 태어나더라도 절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안에서 터져나오는 그림을 향한 열망 때문에 신학교를 그만두고 나왔지만 세상은 그의 그림을 알아주지 않았다. 파리에서 그림을 거래하는 상인으로서 성공한 동생 테오만이, 형의 그림을 칭찬하고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  

스스로의 그림을 향한 만족과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의 극적인 대립. 그로 인해 파도처럼 몰려오는 타인을 향한 부러움과 생활고. '감자먹는 사람들'이라는 - 지금은 명작으로 불리는 - 그림을 그리던 자신의 어두운 스타일을 '개선해야 할 것'으로 여기고 파리라는 대도시를 찾아 한창 유행하는 인상파 화가들의 밝은 색채와 신인상파의 점묘법 등을 따라하며 그의 그림은 개성을 잃어간다. 그 대립을 견디다 못해 정신이 아프기 시작했을 때, 남의 눈이라든지 세상의 인정 같은 것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기 시작했을 때, 그의 억눌려있던 천재성은 폭발한다.

고흐가 말년에 아를의 요양원에서 보내며 그린 그림들, 'Starry night'과 까마귀가 나는 밀밭 등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고흐 미술관에서 만난 그의 작품들은 그렇게 시대별로 굉장히 큰 차이가 났는데, 나는 그 유명한 그림들 사이에서 그가 일몰을 그린 그림 앞에서 한참을 서성여야 했다. 유명한 아몬드 꽃 그림과 까마귀가 나는 밀밭, 아를의 요양원보다도 이전에 미술책에서 한 번도 본적 없던 그 그림이 나에게 훨씬 충격적이었다. 태양이 떨어지는 그 시간이 그저 아름다운 색채의 향연이 아니라, 굉장히 슬픈 순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 나는 내 앞에 펼쳐진 겹겹의 시간들을 통과한 뒤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고흐가 그런 작품을 그려놓았던 것이다.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1년 전에.
 
박물관에서는 고흐가 자살을 해야했던 이유가 여전히 알려진 바가 없다고 말했다.그러나 고흐가 테오와 말년에 주고받은 편지에서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고흐는 자신을 스스로 정신병원에 가두었고, 자신을 무서워했다. 나는 그가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머리의 문제로 괴로워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총구를 당긴 것 역시, 세상에 대한 허무함에서 오는 자기 포기가 아니라 견딜 수 없는 자기 존재에 대한 살해에 가까워보였다.  

이 지점에서 고흐가 실존주의와 정반대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삶의 부조리같은 것에 빠질 여유가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우연히 태어났고, 자신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그 불덩어리를 분출하기 위해 화가라는 직업으로 삶의 방향을 틀었으나 세상은 알아주지 않았고, 분노에 더해진 정신의 병 - 환청이든 현시든 착란이든 - 이 그를 극단으로 몰아간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 고독한 인간은, 구원을 지독하게 갈구하게 된다. 신에게.

암스테르담 고흐 박물관에서 처음으로 보게 된 고흐의 작품 가운데는 신에 대한 작품이 꽤 많았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기적을 그린 작품부터 예수가 부활하던 순간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과 동굴까지. 고흐는 신에게, 그가 선보였던 기적들을 그려 바침으로써 나에게도 그러한 기적을 내려달라고 갈구했다. 그러나 신은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고 인류에게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축복이 되었다. 역사상 가장 중요한 그림이라고 여겨지는 작품들이 그 시기 탄생하게 된 것이다. 고흐는 신의 무응답 끝에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붓질을 시작한다. 그의 손 끝에서 남프랑스의 대자연은 그저 아름다운 공간이 아니라 자연의 순환과 그 안에서 인간의 삶이 가진 비극적인 의미를 담아내는 가상의 공간들로 새롭게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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