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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 셔스터먼의 『수확자』3부작을 읽고

살인이 권력이 된 이상한 유토피아

『수확자』 3부작은 생명공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이 무한히 늘어난 사회의 윤리적 딜레마와, 특이점 이후 인간과의 관계가 역전된 자애로운 인공지능의 아이러니를 다루는 장편 소설이다. 주인공 명은 평범한 청소년 시절부터 유토피아처럼 보이는 사회의 숨겨진 면에 어떤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딜레마의 축을 담당하는 ‘수확자’의 역할을 제안받고 수확자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다.


이 사회의 특이한 점이라면 인간의 수명이 사실상 무한대라는 점이다. 인간은 간편하게 자신의 신체 나이를 젊은 시절로 돌릴 수 있으며, (병원에 입원해야 하긴 하겠지만 수술의 불편한 점이나 부작용에 대한 묘사는 드러나지 않는다) 피 속에 탑재한 나노 로봇이 상처나 병을 빠르게 회복해 주고,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해 준다. 병과 노환이 사라진 상황에서 죽음의 위협은 사고나 살인으로 인한 사망밖에 남지 않았지만, 이것 또한 전세계적인 드론망과 응급 '부활' 기술의 극단적인 발전으로 인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계를 지배하는 인공지능은 언제, 어디서든, 어떤 사고일지라도 드론으로 유해를 수습해 재생 센터로 보내버리고, 거기서는 웬만한 시신이면 다시 살릴 수 있다.


주인공 두 명은 선한 수확자에 의해 수련을 받지만 서로 운명적으로 갈라진다. 한 명은 수확자 집단의 선역을 맡고, 다른 한 명은 악한 수확자의 제자가 되지만 그를 뿌리치고 수확자의 수확자, 어둠의 수확자로 거듭난다. 그 악한 수확자는 자신의 무기인 ‘살인면허’를 수확자 집단에게까지 휘둘러 리더의 역할을 차지한다. (악역이 복잡한 아이러니 없이 단지 악할 뿐이라 매력이 좀 떨어지지만) 세계를 지배하는 인공지능은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여할 수 있지만, 협약에 의해 오직 수확자의 일에는 전혀 관여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인공지능은 두 주인공의 일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간접적으로 관여하여 세계를 바꾸기로 기획한다. 처음 주인공을 길러 낸 선한 수확자는 옛 문헌을 조사하다가, 악한 수확자가 젊은 시절에 얽혔던 어떤 비밀을 파헤친다. 그 비밀은 바로 수확자 집단이 전혀 필요 없이 인류를 존속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주인공 2인의 비극적인 운명과, 인공지능의 자애로운 계획, 그리고 비밀스러운 종교 집단까지 얽힌 스토리는, (내가 지적하고 싶은, 아래에 기술할 어떤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생명공학이 극한으로 발전해 인간의 수명을 무한정 늘릴 수 있다면? 누구나 이와 같은 유쾌한 상상을 꿈꾼다. 하지만 스토리텔링을 업으로 하는 작가라면 이같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한 상상력 같은 데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 스토리의 결말이 “모든 인간이 기술 발전의 혜택을 입어 영원히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로 끝나면 안 된다. 모든 인간이 무한대의 수명을 가졌을 때, 사회의 부정적 영향력이 무엇이 있을 것이며, 또 이 윤리적 딜레마를 어떻게 스토리로 해결할 것인지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해 보라. 인간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되었을때, 주변엔 200살, 500살, 1000살을 살았던 늙은이들만 가득하고, 그들의 노회한 정신머리는 사회를 좀먹어 들어간다.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이들의 보수적인 사고방식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꼴을 이기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투표권을 틀어쥔 노인들을 수적으로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인구는 정체되고 출산률은 “0”을 달성한다. 가장 어린 인간이 100세를 넘어가기 시작하면, 이 사회는 오래 살아 웬만한 자극에도 꿈쩍하지 않는 노인들의 일그러진 탐욕과 끔찍한 권력욕으로 썩어간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식이 뭐가 있을까? 인간을 죽여 새롭게 태어날 아이들이 살아갈 레벤스라움을 마련하는 방식밖에 남지 않은 것 아닐까? 하지만 이런 정책이 과거 인간이 저질러 왔던 치명적인 우생학, 나치즘, 파시즘 정책과 다른 점이 있을까?


이런 아이러니 정도는 다룰 수 있어야 모름지기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닐 셔스터먼 - 수확자(2023), 선더헤드(2023), 종소리(2023)

이 소설 시리즈는 바로 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작품이다. 모두가 영생을 누리게 된 사회, 작품 내 ‘수확자’들은 사회의 합의에 의해 인구를 적절히 감소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그들은 실질적으로 무작위적으로 인간을 선별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다. 원래 인간의 불의의 사건으로 죽으면 인공지능이 나서서 복구하지만, 인공지능과 수확자 집단이 맺은 특별한 협약에 의해 인공지능은 수확자들이 하는 일들에 간섭하지 않도록 했다. 기껏 기술 발전으로 인간의 영생을 이뤄 놓았는데, 굳이 랜덤하게 또 사람을 원래 죽어야 할 만큼 죽여서 사회를 유지시킨다니? 


이 사회에서 인구는 아직 정체에 이르지 않았으며, 여전히 인간들은 출산하려는 욕구를 띠고 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회춘한 후에 또다시 출산을 하기도 한다. 부모가 양육의 수고를 굳이 담당하지 않아도 인공지능이 알아서 케어해 준다. 이 잘못된 정책은 오히려 인구 증가를 심화시킬 것이다. 인공지능이 산출한 통계에 의하면, 실질적으로 수확자가 ‘수확’하는 인구는 순인구 증가분에 비해 택도 없이 적아서 인구수 증가의 가파른 기울기를 줄이는 데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인구를 증가도 감소도 아닌 변화량으로 유지시키려면 수확자들이 더 많아야 하고 더 열심히 일해야 할 텐데, 그럴 바엔 그냥 인간을 영생시키지 않는 거랑 뭐가 다른지 사람들은 체감하지 못할 것이다. 작품에는 명확히 언급하진 않지만, 내 생각은 이 사회는 전혀 지속가능한 형태가 아니다. 인간은 영생하고, 사람들은 자식을 (더 많이) 낳는다. 수확자라는 집단은 유명무실하다. 자원은 언젠가 분명 한계에 봉착한다. 인류는 역사상 아주 잠시 동안만 기쁜 나날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수확자가 원래의 설립 목표인 ‘인구 조절’에 큰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는데도 그들의 권력은 말도 안되게 강력하다. 그들은 집단적으로 발휘하는 ‘살인면허’를 가지고 있다. 그 무소불위의 권력 집단을 전지전능한 인공지능이 왜 건드리지 않냐면,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한없이 자애롭게 설계되어 있고, 설계 당시엔 적어도 살인은 인간이 맡도록 하여 그들 스스로 책임지도록 하려는 깊은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인 면허를 가진 권력 집단을 양성하다니, 그런 끔찍한 발상은 이 세계관 최악의 결정이라고 할 만하다. 사실상 나에겐 작품 내의 끔찍한 결정이라는 생각을 넘어, 세계관 구성의 실패라고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1. 앞서 말했듯이 수확자 집단이 살인을 저지르는 횟수는 인구의 증가세를 거의 누르지 못하므로, 그들의 존재 가치는 거의 없다.


2. 그들의 계명에도 “편견 없이, 편협함 없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고, 실질적으로 무작위로 죽을 사람을 선별한다고는 하는데, 그들은 자신들에게 뭔가 맘에 안 드는 짓을 한 인물에게 “수확해 버리겠다”는 위협을 서슴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맘에 안 들었던 부분이다. 악역인 신질서파뿐만 아니라 선역이며 작품의 정의관을 담당해야 할 보수파들마저도 자신들의 권력을 주관적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도구로 쓴다. 분명 이 세계관에서 수확자에게 주어진 역할이 심판관이 아닐 터인데.


3. 사회의 구성원들은 수확자가 나타나 “난 오늘 너를 수확하러 왔어”라고 말하면, 거부하거나, 도망치거나, 반항하지 않고 그냥 순순히 자신의 목숨을 내놓기로 협조한다. 이런 말도 안되게 억압적인 사회가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만장일치 합의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사회적으로 왠지 당연히 있을 것 같은 혁명 세력이나 극단주의 테러 집단은 없다. (비폭력주의에 가까운 소극적 종교 집단 뿐) 분명 어떤 이는 죽기 싫어서 수확자와 맞서 싸우거나, 우발적으로 옆에 있는 과도를 들어 수확자의 눈을 찌를 수도 있다. 하루에 수백 건의 수확이 벌어진다고 해도, 죽기 싫어서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이 하루에 한 명은 나올 것이다. 그러면 그는 도망자가 되고, 도시의 지하엔 그들을 숨겨 주는 인도주의 집단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도망자는 하루에 한 명은 나올 것이고, 그들이 일 년만 모이면 300명은 넘을 것이니까) 그리고 그들에게 무기가 공급되기 시작하면, 그 인도주의 집단은 바로 과격 테러 단체가 되어버릴 것이다. 뭐 아마도 역사의 초창기에 수확자들이 그들을 거리낌없이 수확해 버렸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런 설정에도 내 의문은 또 다시 한 바퀴 돈다. 수확자들이 심판하는 역할을 맡은 존재가 아니지 않나? 


4. 특히 수확자라는 집단이 전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기가 애정하는 무기’를 이용해 살인한다는 설정은 작품의 개연성에 해를 끼칠 정도로 기괴하기 이를 데 없다. 수확자 집단을 처음 만들 때, 인간 사회는 어째서 ‘동일한 방식으로’, ‘가장 인도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무기’를 이용해야 한다는 합의를 하지 못했을까? 현대 사회가 사형을 집행할 때, 처음엔 참수, 다음엔 총살, 그다음엔 교수형, 전기의자를 거쳐 현재 약물주사형으로 발전했겠는가? 권력이 살인을 피치 못하게 저지른다면, 대중에게 최대로 공정하고 객관적인 것으로 보여야 할 필요가 있다. 권력이 살인을 좋아하고 즐기는 것처럼 보여선 안 된다. “수확자는 살인을 좋아하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보수파마저 각자 좋아하는 칼, 총, 무기를 집에 진열해 놓고 “오늘은 무엇을 이용해 볼까?”라고 혼자말하며 고르는 모습은 좀 소름끼친다.


이와 같은 설정들은 모두 “왜 이 사회는 본 기능은 거의 유명무실한, 서로 권력 다툼에만 골몰한 무시무시한 살인 집단을 용인하는가?”라는 의문점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 작품은 이 의문을 결말을 통해 풀어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작가의 세계관 구성의 실패다.




다행히 소설은 길고, 말이 안 되는 설정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을 억지로 죽죽 읽어 나가다 보면 그냥 대강은 몰입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일견 유치하게 들리는 수확자의 ‘무기 사랑’ 설정은, 이 소설이 청소년용으로 쓰였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참작할 만한 정도라고는 생각한다. (아무리 그래도 청소년에게조차 말초적이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지만.) 앞서 말한 대로, 인류가 영생을 달성한다는 스토리로 빠지지 않고 영생 이후에 변화되는 사회의 모순을 정면으로 다룸으로서 ‘유토피아는 없다’는 오래된 SF적 교훈을 되새기기도 한다. 결말도 자체엔 큰 플롯 상의 재미는 느낄 수 없었지만, ‘전지전능한’ 인공지능이 인류를 구원한다는 상식 선의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럭저럭 무리없는 끝을 지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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