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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혁 Dec 17. 2020

2020년이 나에게 남긴 것들

저절로 굴러가는 건 아무것도 없다.

Photo by Kelly Sikkema on Unsplash


원더키디를 기억하는 세대에게는 나름 감회가 새로웠을 2020년. 1월부터 슬그머니 고개를 들던 바이러스가 덥썩 계절을 집어 삼켜버리고 어느새 12월이 되었다. 많은 이들에게 잃어버린 한 해로 기억될 올해를 나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무엇을 남겼나. 작년보다 더 나은 한 해가 되었나. 연말이면 으레 그렇듯 떠나온 시간들을 곱씹어 본다.




비즈니스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내가 속했던 조직들은 대부분 기능 중심이거나 지원을 목적으로 했던 탓에 할당된 서비스 없이 겉도는 경우가 많았다. 서비스의 모든 것을 100 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 중에서 5 정도만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며 훈수만 잔뜩 늘어놓고, 정작 그 결과는 모른채 지나가는 일이 흔했고, 우리 조직의 조언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며 불만만 쌓아두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변화없이 현상 유지만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서비스도 실상은 엄청난 ‘운영’ 의 바다를 건너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UX 디자이너니까 여기까지가 내 할 일이야.” 라고 스스로 경계 속에 갇혀 지냈다면 아마 영영 몰랐던 사실들을 올해 많이 경험하게 되었다. 제품을 만드는 것 이외에도, 재무, 법무, CS 등 수많은 담당자의 손이 모여서 한 판의 비즈니스를 굴리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알아서 굴러가는 게 아니라, 굴려야 굴러간다.


데굴데굴 Ⓒwikipedia




속도의 중요성


작년에 이직한 이 회사는 조직 구조가 좀 독특하다. CEO 아래에 각 서비스별로 독립된 스튜디오처럼 팀이 구성되어 있고, 해당 팀에 대부분의 책임과 권한이 있다. 한마디로 각자 알아서 잘하면 되는 구조.


모든 것을 알아서 해야 하는 탓에 인사나 재무 등 제품 이외의 이슈는 해결하기 벅찬 측면도 없지 않지만, 제품 개발만 놓고 보면 굉장히 효과적으로 진행되었다. 아이템이 정해지고 3개월 여만에 베타 서비스를 런칭했고, 2주 간격으로 새 버전을 배포했을 정도로 빠른 템포 덕에 서비스는 시장의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며 성장을 거듭했다. 이 정도면 우상향이 아니라 J 커브 수준이 아닐까.


그 결과, 우리팀은 곧…





판교 밖의 사람들


서비스 아이템 특성상 IT 업종 이외의 분들과 함께 논의할 일이 많았고, 현재도 함께하는 많은 분들이 판교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배경을 가지고 있다. 스키마가 다른 덕분에 신선한 시각으로 서로에게 자극이 되기도 하지만, 상당히 잦은 빈도로 커뮤니케이션 이슈가 발생했다.


서로 다른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물리적인 거리의 한계는 차치하더라도,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각자의 전문용어나 은어들을 사용하기 일쑤였고, 정리되지 않은 서로의 생각들을 풀어 놓는 데에 급급한 나머지 핵심을 놓치는 경우도 많았다.


처음에는 ‘대체 이 분들이 왜 이러시는걸까?’ 하는 물음표로 숱한 밤들을 보냈지만, 그 분들 역시 나를, 우리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짐작한다. 기본적인 것이라 여겼던 많은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낯설고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놓치고 살았던 것 같다.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되는 ‘협업하는 말하기’





데굴데굴


회사와 직업을 빼고 나를 소개할 수 있는 2020년이 되자고 다짐했건만, 회사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은걸 보니 올해도 실패인가 싶다. 올 한 해 회사를, 일을 빼고 나면 나에게 무엇이 남았나.


‘그때 그랬어야 했는데’ 하며 늘 과거 속에서 살던 나는 딸과 함께 성장하며 겨우 현재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하지만 투병중이던 친구와의 마지막 통화 이후로 나는 다시 과거에 갇힌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걸. 좀 더 다정하게 통화할걸.


친구가 떠난 자리에는 그가 만든 25권의 책이 남았고, 내 청첩장이 남았고, 그를 추모하는 많은 이들의 마음이 남았다. 한동안은 불현듯 올라오는 슬픔에 눈물을 참느라 힘이 들었고, 눈 앞의 무언가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존재는 영원할 수 없지만, 부재는 영원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입술 모양의 그늘」이하나 지음 (독립출판물. 2020)


얼마 전 지인이 출간한 단편집 속의 글귀 하나가 유독 눈에 밟혔다. 앞으로도 영원할 친구의 부재가, 영원할 수 없는 존재들의 소중함에 대해서 매일 매일 새삼스레 일러준 덕에, 겨우 일상에 한 발 들여 놓는다.


거리두기와 재택근무로 말미암은 자발적인 고립이 힘겹다. 회사를 빼고, 일을 지우고 난 자리에는 영원할 수 없기에 더 소중한 일상이 남았다. 그럭저럭 살아지는 것 같았지만, 굴려야 굴러가는 회사와 일 만큼이나, 부지런히 굴려야 겨우 한 바퀴 구르는 일상이다. 내년에는 조금 더 힘내서 잘 굴려보길.


데굴데굴.




2020년 12월 17일에 발행한 미디엄 원문 링크를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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