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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혁 Nov 24. 2023

행복의 말들

조금 이른 회고

Photo by Madison Oren on Unsplash



회(回)


아직 한 해를 마무리 하기에는 이른 시점이지만, 아마 다음달이면 이런 저런 일들로 정신없이 보낼 것이 분명하다. 잠깐이나마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시간을 쪼개어 간단히 정리해 보는 것으로 회고를 갈음할 수 있지 않을까.


올해 역시 평소와 다르지 않은 평범하게 힘든 날들이었다. 회사의 업무는 여전히 복잡하게 뒤엉켜 풀기 어려운 실타래 같았고, 나는 종종 매듭을 풀기도 하고 다시 묶기도 하며 직장인의 삶을 살아냈다.


가끔 무방비한 상태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가 생각나 가만히 침잠하거나, 딸의 애교에 마음이 동하여 두둥실 부유하기도 했다.


통렬한 회고도 비장한 계획도 제게는 너무 어렵습니다. 
성장은 고사하고 제자리를 지키며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겨울 때가 많습니다. 아마 올해도 비슷하겠지요. 
그저 하루 하루 살아갈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해의 바람이 있다면, 
명민함과 솔직함을 가장한 비난과 무례가 줄어들기를, 
모두가 나름대로 생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음을 인정하기를, 
그래서 더욱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조금 덜 치열해도 괜찮다고 말해줄 새해가 되기를, 
궂은 일에 우는 날보다 좋은 일에 웃는 날이
조금 더 많은 새해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새해에도 부디 평화를 빕니다.

23.01.01


작년보다 조금 더 웃을 일이 많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만약 감정의 계좌가 있다면, 또 거기에 희비가 입출금 내역으로 기록된다면, 잔고가 바닥나지는 않았을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결국 돌고 도는 쳇바퀴 같은 삶이라고,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허무해질 때쯤, 마음의 병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나도 언젠가 죽는 날이 오겠지만 
죽음의 도화선이 회사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세상에 소중한 것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고작 돈 좀 벌어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회사에 짓눌려 
네 탓 공방만 하다가 생을 마감하는 일만은 피하고 싶다. 
일하다 죽는건 멋없다고. 친구가 그랬었지. 
23.05.09

아내가 예전 회사 경험을 얘기하면서 
사무실에 있을 때 종종 숨 쉬는 것을 잊었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23.05.10

서비스의 성과를 UV, PV나 DAU, MAU로 측정하는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지만 딱히 그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알 것 같다. 
저 수치들은 사람들의 시간을 얼마나 빼앗았는지에 대한 것들이다. 
23.07.17



고(顧)


딸의 방학을 맞아 이웃나라에 잠시 여행을 다녀오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무엇보다 의사의 상담과 처방이 주효했을테지만, 스스로 느끼기에 심신의 안정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책과 말이다.


집중해서 활자를 읽는 동안에는 근심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에 잠시 다녀올 수 있었다. 아직 책상 위에 던져놓고 못 읽은 책들이 많지만, 그래도 그간 읽은 몇 권의 책들은 진부한 표어가 딱 들어맞았다. 책은 마음의 양식임에 틀림없다.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사계절)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생각의길)
은유, 다가오는 말들(어크로스)
한이리, 게르니카의 황소(은행나무)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창비)
장류진, 달까지 가자(창비)
히가시노 게이고, 연애의 행방(소미미디어)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곰출판)
요한 하리, 도둑맞은 집중력(어크로스)
김초엽, 행성어 서점(마음산책)
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자이언트북스)
장류진, 연수(창비)
- 읽은 책

김인정, 고통 구경하는 사회(웨일북)
- 읽는 책

김초엽, 파견자들(퍼블리온)
테드 창, 숨(엘리)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엘리)
- 읽을 책


말은 또 어떤가.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따라 듣는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한다. 아내의 지지와 딸의 싱그러운 언어들이 자주 내 마음을 달뜨게 했다. 딸의 말문이 트이던 시절부터 수집한 말들이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파란 이불을 펼쳐놓고 뛰어들며)
바다에 풍덩~! 나는 바다 덮고 자요.

(걷다가 개나리 꽃이 볼에 닿았을 때)
개나리가 나를 간지럽혀요. 왜 간지럽히지?
개나리야 나랑 사이좋게 지내자~

(계속 네 살 하면 안돼?)
다섯살 되서도 예쁠거야~

(다섯살엔 뭐하고 싶어요?)
더 많이 사랑해 줄게요!!

(정말 소중한 건 돈으로 살 수 없어.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 같은 건.)
난 물건이 아니니까~ 파는게 아니니까~
마음이 살랑살랑하고 따뜻해지는거는 못사요~

(일곱살 가을 어느 날)
나뭇잎은 무섭겠다. 
나뭇가지가 꼭 잡아줬었는데, 
이제 높은 것에서 혼자 떨어지잖아요.

(마음이 튼튼해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아빠를 꼭 안아주면 돼요.

(웃을 때 내 눈가의 주름을 보며)
아빠 웃을 때 눈가에 물고기가 있어요.


나이를 먹을수록 자극의 역치가 높아져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기 쉽지 않기에, 필사적으로 행복을 길어올려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적고 보니 참 괜찮은 인생이다 싶다. 주로 힘들고 가끔 행복하다 느끼지만, 옅은 힘듦과 짙은 행복이라 지낼만하다.


내년에도 부디 소소하게 달그락거리며 굴러가는 삶이길 바라며.




2023년 11월 24일 미디엄에 발행한 원문 링크를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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