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길성 Mar 10. 2024

먹기 위해 사는 인생

먹고사는 삶에서 배우는 지혜

    나는 뷔페에 가면 평소 먹기 어려운 음식을 골라 먹는다. 특별히 싫어하거나 안 먹는 음식은 별로 없다. 다양한 음식이 있을 때 먹고 싶은 걸 골라 먹는 걸 당연하다고 여길 뿐이다. 그러나 아내는 나와 취향이 아주 다른 편이다. 평상시 먹던 걸 뷔페에서도 늘 선택한다. 잡채나 김밥, 김치가 그것이다. 소화가 잘 되는 야채와 과일, 호박죽도 단골 메뉴에 해당한다. 아내에게 색다른 음식이래야 생선이나 고기 조림, 아니면 떡이나 제빵 정도가 고작이다. 40년 동안 지켜본 아내의 한결같은 식성이 아닌가 싶다. 


   아내는 먹는 것뿐 아니라 운동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걷는 운동을 하루도 거르는 법이 없다. 무병장수를 상징하는 학과 거북이처럼 적게 먹고 부지런히 활동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학수 천년 구수 만년'이라는 방수의 비결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한다 할 수 있다. 모이를 적게 먹는 학이 천년 살고, 숨 고르기를 잘하는 거북이가 만년 산다는 말이 '학수 천년 구수 만년'이다. 아내의 신체 나이가 실제 나이에 비해 20년이나 젊게 나타나는 걸 보면 그 말이 틀린 것 같지는 않다. 식사와 운동이 건강에 소중한 건 사실이다.

 

   아내의 식습관에 비해 나의 식습관은 엉망이다. 불규칙적인 식사에 적은 운동량은 배가 나올 조건을 갖춘 셈이다. 뷔페에 가기 전 굶고 갈 정도로 식탐이 많고, 미련한 곰처럼 식욕을 부려 혼쭐이 나도 먹는 식습관 때문이다. 뷔페에 다녀오면 배가 아파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 먹을 것으로 차고 넘치는 세상에 살면서 굶주린 사람처럼 식탐을 부리는 식욕 중독자나 다름없다. 먹기 위해 사는 세상에서 아직도 살기 위해 먹는 이방인처럼 살고 있다는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식구는 많고 식량난에 허덕이던 어린 시절이 그랬다. 끼니가 불안하니 꿀꿀이죽도 싸우다시피 먹어야 했다. 식욕 해소가 생존 목표나 다름없던 살기 위해 먹던 시절이라 할 수 있다. 땀 흘려 일해야 먹을 수 있는 시절엔 비만은 없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당뇨는 부자들이나 앓던 사치병으로 알았던 것도 사실이다. 절대 빈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영양실조로 인한 빈혈이나 허약 체질은 걱정할 필요도 없어졌다. 그럼에도 그 시절 마음속 굶주렸던 악령들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식욕을 부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식생활이 풍요로운 세상이다. 미디어마다 먹거리가 등장하고 거리마다 먹거리 시장이 유혹하고 있다. 주문한 하면 원하는 음식을 배달해 주고 24시간 먹고 즐길 수 있는 음식 문화 강국에 살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가장 심한 타격을 입는 곳이 요식업체다.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가게가 문을 닫는 광경을 자주 목격한다. 민생 흐름의 바로미터가 음식 문화라 할 수 있다. 다양하고 풍부해진 음식 문화의 영향이 그만큼 커졌단 얘기다. 살기 위해 먹던 시절이 이젠 먹기 위해 사는 세상으로 변한 게 확실하다.


   먹기 위해 사는 세상은 식습관도 바뀌었다. 아침 식사로 빵 조각에 우유 한 잔, 커피 한 잔이 전부다. 아점이니 점저가 유행이 아니라 일상이 됐다. 집에서 아침을 챙겨 먹는 사람은 아내와 둘 뿐이다. 나 또한 점심을 거른 지 3년 째다. 당뇨와 비만을 걱정하면서 끼니를 거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요즘은 공복감을 즐기는 재미를 느낀다. 어쩌다 점심이 부대껴 가뿐하던 몸이 더부룩해 불편함이 느껴진다. 예전에 비해 맵고 짠 음식에 예민해진 것도 사실이다. 나이 들어 입맛도 철이 드는 모양이다.


   삶의 근원이 식욕이다. 배고픔과 배부름으로 사는 격이다. 식욕의 자유를 어떻게 누리고 살 지를 고민하고 따지는 것이 의미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배고픈 순간과 배부른 순간을 겪어온 인생을 돌아봐도 그렇다. 식욕을 참는 인내와 먹는 즐거움을 반복 재생한 삶에 불과하다. 다람쥐 쳇바퀴 속에서 비우고 채우기를 무한 반복한 삶에 지나지 않는다. 권태로운 삶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으로 살아온 것도 사실이다.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원하고 추구하며 살아온 식욕에 의한 삶이라 할 수 있다.


   식욕을 달래고 조절하는 지혜를 배워야 하는 까닭이 아닐까. 건강하면 건강의 소중함을 모르고, 먹고살기 바쁘면 행복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간다. 아파봐야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고 불행이 닥쳐야 평온한 삶이 소중함도 깨닫는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배고픈 아픔과 비만의 통증을 이겨내는 지혜를 배워야 하는 까닭이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정작 필요한 능력이나 지혜는 고통과 불행을 이겨내는 능력과 지혜이기 때문이다. 배가 고파도 고통이지만 배가 불러도 고통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고통과 불행은 누구나 싫어한다. 고통과 불행을 잘 견디지 못하고 미성숙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원인이 아닐까 한다. 건강한 식습관과 운동으로 자연치유력을 키워야 하듯이 사유와 성찰로 삶의 면역력을 카워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상처가 생겨 덧나지 않게 관리를 잘하면 오히려 굳어져 강해지게 된다. 살면서 실패나 실수를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화력이 약한 아내가 소식하는 한결같은 식습관으로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로 삼는 것처럼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가족이 그리운 명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