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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길성 Feb 13. 2024

가족이 그리운 명절

소중한 가족을 지켜야 하는 이유

     세종에서 대전으로 오는 도로가 갑자기 막힌다. 15분이면 갈 수 있던 길이 오늘은 30분이나 걸렸다. 설 명절이 시작된 것이다. 10년 전쯤 나도 그랬다. 안성에서 대전이 그리 먼 곳은 아니다. 하지만 서너 시간 넘게 차를 몰아야 했다. 자동차로 도로가 막혀 답답했어도 마음은 여유로웠다. 고향에 가면 반가운 얼굴이 기다린다는 생각에 설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떠난 후로는 삶도 많이 변했다. 고향을 찾던 여정부터 멈춰 섰다. 즐겁고 설레던 명절이 가족의 품이 더욱더 그리워지는 명절이 아닌가 싶다. 


    설날이라고 해야 떡국을 먹고 새배와 용돈을 드리던 게 전부였다. 하지만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가능했던 일이다. 건강할 땐 건강이 소중한지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 부모님이라는 존재가 그런 것 같다. 자식을 건사해야 한다는 구실로 부모님 존재를 잊거나 소홀한 적도 많았다. 욕망의 노예로 살면서 부모님 사랑의 소중함은 망각하고 살아온 것이다. 황혼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가장 후회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을까. 아등바등 바보처럼 살아온 인생에 대해 회한이 느껴지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고아가 새해를 맞은 날 카톡에 영상이 도착했다. 스웨덴 딸이 보낸 영상이다. 한복을 입은 손자 손녀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며 새배를 한다. 절하는 모습이 기특하여 눈물 나도록 반갑기만 하다. 스톡홀름에서 자란 손주가 한국의 설 문화를 알 리가 없다. 향수가 그리운 딸이 달래는 마음에서 영상을 찍어 보냈으리라. 다음날 세종 사는 딸이 새배 인사를 왔다. 9개월 된 손자가 한나절 기어 다니며 놀다 갔다. 재롱부리던 녀석의 흔적이 눈에 선하기만 하다. 북적이는 설이 아니어도 모처럼 온기를 느낀 설날이었다.


    포로나 인질로도 삼을 만큼 공동의 운명체가 가족이다. 누구보다 소중하게 아끼는 관계라는 뜻이 아닐까. 가화만사성을 종교처럼 믿는 사이가 가족 관계이다. 집안의 화목을 최우선 목표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새벽잠을 포기하고 한국축구는 응원하는 것처럼 하나로 뭉쳐 사는 문화를 좋아한다. 나보다 우리를 유난히 중시하는 이들이 한국인이 아닐까 한다. 한 배를 탄 공동체를 소중하게 여겨 가족 문화에 익숙해진 것은 아닐까.


    지치고 힘들 위안이 되는 가족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 살다 보면 위로와 격려가 삶에서 꼭 필요하다. 각박한 현실과 싸우느라 다치거나 피로할 때 안식처가 있어야 한다. 걱정과 불안을 안고 살아도 기댈 수 있는 곳은 가족이 가장 편하다. 네 것 내 것 구분하지 않는 사회는 가족이 유일하다. 욕망에 의존한 삶은 충돌이 불가피하다. 사회는 싫거나 원하지 않으면 돌아서면 그만이지만 가족은 그럴 없다. 가족이라는 운명 공동체는 부정할 수도 부정해도 된다.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며 지켜야 하는 까닭이 아닌가 싶다. 


    사는 방식도 배고픔과 배부름을 왕복하는 먹고사는 방식과 같다. 믿고 의지하며 살다 보면 실증도 배신도 느끼기 마련이다. 공동체 삶이 불편하고 힘들다고 혼자 살 순 없다. 혼자 있으면 밥도 먹기 싫은 나로선 혼족의 삶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혼자 일상을 즐기는 수백만 혼족이 반쪽 인생처럼 애처로운 느낌이다. 혼자 왔다 혼자 떠나는 인생이라 하지만 불행한 일이다. 유기인이나 수행자처럼 사는 모습이 고독하고 외로운 건 사실이다. 가족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공동체 삶이 그래도 사람답게 사는 길이 아닐까.


   한 치 걸러 두 치가 얽혀 가족이 구성된다. 갈등이 필연일 수밖에 없다. 칡나무와 등나무가 꼬인 모습이 갈등이다. 일심동체 부부의 삶과 비슷하다. 칡나무와 등나무가 얽힌 가지를 풀려고 하거나 자리를 바꾸려 하면  덩굴은 죽고 만다. 네 것 내 것 구분하고 가려내면 부부의 신뢰는 무너지게 된다. 평온한 가정을 무너뜨린 근본적인 원인이 아닐까 한다. 서로가 자신의 소유와 자유를 주장할 줄 알지 가족 공동체의 소중한 삶은 부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손님이 친해지고 가까워진다고 손님은 손님이다. 사위나 며느리는 백년손님이라는 말처럼 아들이나 딸처럼 대하는 것은 오버다. 사위나 며느리는 귀한 손님으로 존중과 대접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 생각한다. 고부갈등이나 가족 불화의 시발점이 아닐까 한다. 사위 며느리를 아들 딸로 생각하기에 앞서 귀한 손님으로 맞이하는 자세가 현명하지 않을 성싶다. 다름을 먼저 인정하여 받아들여야 평온한 가정을 이루고 가족의 안정도 찾을 있지 않을까 한다. 내 아들 딸이 귀하고 소중하듯이 사위와 며느리도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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